[영화, 해찰] 귀로 듣는 책, 읽는 사랑의 운명적인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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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찰] 귀로 듣는 책, 읽는 사랑의 운명적인 비극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2008, 스티븐 달드리)
채어린 자유기고가

[GJ저널 망치] 나를 사랑하나요?

묻지만, 나는 당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말은 말 때문에 소음이 되고 나의 문해력은 가히 문맹의 벽처럼 굴 때가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런 따위를 의문하면 이미 다음 말은 나를 비켜나 버리기 일쑤이고, 그 결과에는 필연코 발생하는 충돌이 새로운 해답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가진 그 남자의 첫사랑.
마지막 운명을 타고난 여자의 비밀.

어울릴 수 없는 연인의 끌림은 용서받을 수 없는 까닭에 운명적이라 해야 옳을 것 같다. 10대 소년인 마이클과 30대 여인 한나는 비밀스러운 연인이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은 점점 더 확고해진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차단해버린 여인은 어린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오디세이> 등을 소년의 목소리로 읽는 동안은 불안과 공포의 시대에 닥쳐올 운명을 예비하는 제의(祭儀)일지도 몰랐다.

홀연히 사라져버린 여인과 법대생이 된 소년.

그리움의 시간이 흐르지만 마이클의 시간은 흐름이 아니었다. 끝끝내 붙들고 싶던 안간힘의 정체는 자신도 모르게 박제해 버렸는지도 몰랐다. 홀로코스트 전범 재판을 참관하기 위해 법정으로 가는 그의 눈에 밟힌 그녀. 시간의 마법으로 훌쩍 바뀐 배경이지만, 소년의 시간은 전범(戰犯)으로 영어의 몸이 된 그녀를 한사코 붙들고자 한다. 하지만 사랑의 비밀은 또다시 그녀를 마술처럼 감춰버린다. 재판정은 그녀의 필체를 확인하고 모든 죄를 인정한 그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소년은 여인을 위해 새로운 목소리, 새로운 목록, 새로운 감정을 터득한다. 또다시 시작된 단절과 녹음테이프는 새로운 인생이 된다. 그녀가 문맹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이클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마이클은 또다시 새로운 목소리로 새로운 희망으로 더욱 새로워진 사랑으로 녹음을 한다. 한나는 녹음과 함께 들여온 책 속의 활자들로 글을 깨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편지를 쓰게 되는데.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누군가는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누군가는 사랑의 잔인한 비밀을,
누군가는 문맹의 부끄러움을 말하게 될까.


한나는 법정에서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이면 어떻게 했었겠냐고.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했을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상에서, 가족도 없고, 문맹이라는 치명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서……. 전쟁이 끝난 후 죄의식의 제물이 된 그녀에게 무엇을 물을 것인가? 모범수로 출소를 앞둔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우리는 그녀의 무엇에 대해 궁금할 수 있을까?

“그녀는 모든 것을 꿰뚫을 듯이 앞만 바라보았다. 그것은 거만하고, 상처 받고, 길 잃은, 그리고 한없이 피곤한 시선이었다. 그것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시선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발췌 인용함)



감독: 스티븐 달드리
출연: 한나(케이트 윈슬렛), 어린 마이클(데이빗 크로스), 어른 마이클(랄프 파인즈)


채어린
자유기고가



*본 내용은 지난 2025년 8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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