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찰] 시, 낭만, 청춘, 사랑…… 오,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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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찰] 시, 낭만, 청춘, 사랑…… 오, 카르페 디엠!

죽은 시인의 사회 (1989, 피터 위어)

[GJ저널 망치] 그때 나는 헤세와 릴케과 서정주와 청록파의 시들을 읽었어. 교정의 벤치에 앉아 읽었고, 강이 보이는 언덕에 앉아 읽었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읽다가 잠들곤 했어. 시가 뭔지 몰라도 좋았어. 언어의 질감이 이룩한 소묘들은 낯설면서도 곧 눈 앞에 펼쳐진 듯이 신비로웠어. 하지만 나는 시의 위반(違反)을 목격해버린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이렇게 쉽게……, 그게 가능한 거였어?

삶은 전혀 시적이지 않고, 낭만이나 사랑은 도리어 위험한 감정에 불과했지.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무엇이 문제인 걸까.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하지. 인간 안에는 피조물과 창조자가 일체가 되어 있다고. 인간 안에는 소재, 파편, 과잉, 진흙, 오물, 무의미, 혼돈이 산재해 있다고. 그러나 또한 인간 안에는 창조자, 형성자, 해머의 강인함, 관찰자의 신성함도 있다고. 그리곤 묻지. 이러한 이중성을 가진 인간이 허무주의에 빠져 <종말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자기 극복을 통해 건강한 인간, <위버멘쉬>로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는 자신의 실존적 선택에 달려있다고.


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주인공 키팅 선생은 ‘쓰레기’ 같은 교과서를 찢어버리라고 충동하는데, 돌이켜보면 내게 찢어버려도 괜찮았던 책이 있기나 했던가. 과감하게 내던져버려도 좋았던 위엄과 교조 따위가 있기나 했던가. 은밀한 위협으로 다가왔던 힘에 대한 굴종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카르페 디엠! 그리하여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소리치지. 그런데 과연, 나는 내게 주어진 여분의 삶을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을까. 지금껏 즐기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다르게 살 수 있을까. 로버트 프로스트는 이런 시를 썼지. “숲에 난 두 갈래의 길 중에서 나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들었다”라고.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스러운 조직에 대해 말해줄 때 학생들은 눈빛을 빛내지. (아아아, 빛났다고 말하는 게 과연 옳은지 모르겠다. 차라리 내 심장과 눈빛이 그랬다고 고백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호기심 많은 닉, 찰리 달톤, 토드, 카메론…… 들은 새로운 세계의 동경으로 안개 깔린 어두운 숲을 달려나가지. 그리고 마침내 <그들만의 세계>를 성공하지. 맞아,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성공>이라는 말로 정당성을 부여해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어. 시간이 흘러도 기억 속의 한 갈피로 남을 만한 장면은 누구나 소중한 거니까.


<죽은 시인의 사회>로 은밀한 (시적) 경험을 공유하게 된 친구들이지만 그들이 처한 (시적) 현실은 강요된 성적과 미래에 붙들려 있지. 분명한 것은 사랑, 행복, 꿈, 바람, 열정과 대립할 수 있느냐인데, 결국 유예할 수 없는 낭만은 <무모함>으로 전가되고, 사랑, 아름다움, 꿈이 죽어가는 사회에서는 <시>를 즐길 수도 즐겨서도 안 됐던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진실이라면, 무엇을 잊고 사는가. 왜 사는지를 잊고 살아도 괜찮은 걸까.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을 배운다 해도. 왜?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른 채 배운다는 것처럼!


그래서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어라. 오래된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오늘 웃고 있는 이 꽃은 내일은 죽어 사라지리니.”

결국 키팅 선생을 떠나보내는 학생들이 책상에 올라서는 장면은 영화사의 명장면 중 손꼽히는 미장센인데, 책상 높이에 우뚝 올라선 학생들을 나는 아름드리 우거진 오래된 숲으로 연상했어. 모두가 함께, 특별한 삶의 이유를 발견한 자들의 거리낌 없는 의지와 향기로.




감독: 피터 위어
출연: 로빈 윌리엄스(존 키팅)







채어린
자유기고가


*본 내용은 지난 2024년 7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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