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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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화양연화

화양연화 (花樣年華, 왕가위, 2000)

[GJ저널 망치] 가랑잎 버석거리는 기척도 없이 고즈넉하다. 오고 가는 동안, 숱한 순간들이 지나치는 동안 그러하다. 말없이 나누는 끝없는 대화의 적막감은 삶의 비애와 숭고의 절정이 곧 사랑일 뿐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차라리 침묵으로 설득하려는 지난한 몸짓과 안타까운 시선들……. 친절한 미소와 농담을 나누는 이웃들이 있지만, 누구나 허방 같은 마음은 조금씩 감추고 살아간다고, 낙서도 은밀한 고백도 남길 수 없어서 텅 빈 채 비워둘 수밖에 없는 비망록이라고.

신문사 편집장인 차우와 아름다운 여인 리첸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한 주택으로 이사 온다. 비좁은 통로에서 그들의 가구와 책, 살림살이들이 엇갈린다. 분주한 가운데 추슬러야 할 각자의 생활은 그렇듯이 온갖 생채기처럼 엄연하지만, 복선으로 엿보이게 해주는 카메라의 활동적이면서도 심연인 양 엇갈림 속의 마주침으로 변주되는 장면들은 결단코 놓치지 말아야 할 필연이다.


마작을 하거나 시시껄렁한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집주인과 이웃들 사이에서 차우와 리첸은 차츰 이웃이 되어간다. 당연하고 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그녀)의 일상은 옆모습으로 혹은 뒷모습으로 남지만, 너무 오래된 나머지 낡아 보이는 시선들은 차라리 지루하게 반복되는 가운데 새로운 빛이나 색깔을 얻으려는 염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낯선 감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갈 듯하다가도 멈춰버린다. 뜨겁지도 않고 격정적이지도 않다. 아쉬움, 미련, 갈등 같은 감정은 차라리 당신의 몫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일찍이 이 영화를 보았다면 찰나가 만든 공허의 한순간에 집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펼치는 연기와 영상의 향연을 말이다. 어쩌면 당신은 영화를 본 게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훔쳐보고자 했던 지나친 상상력이 그려낸 착각일지도 모른다. 비현실적인 몽유(夢遊)의 시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사랑, 화양연화는 그런 게 아닐까.


차우가 골목길에 서 있다. 다른 골목에서 리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흘러나오는 첼로는 차라리 고독을 입체화 한다. 좁고 비탈진 계단. 백열전등이 흔들린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홀로이 외롭고 쓸쓸한 첼로와 흔들리는 전등에 반영되는 그녀. 이때의 외로움도 당신 몫이다. ‘불륜’이라는 (사회적) 불온함에 채색된 애틋함은 미화되지 않는다. 절제와 차별로 스치듯 지나가는 손, 놓칠 수 없을 안타까움을 담은 텅 비어버린 눈길만으로도 사랑의 본질을 깊숙이 파헤친다. 새삼 ‘진선미의 숭고’와 도덕에 대해 항변하고 싶어진다. 거기에 <2046호>가 있다. 그 방문 앞에 서면 누구라도 인생의 온갖 감정에 대한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또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앙금이 된 자신만의 보물을 위해 어두운 통로를 빠져나가는 일 말이다.

그것은 한순간이 영원에 이르는 또 다른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면(裏面)이 된 표정에는 서로를 의식하는 눈빛과 야릇한 분위기, 비켜가는 순간까지 극단의 정지가 되고 또 그것은 어찌할 수 없이 밀물처럼 다가오는 미래로 확장되는 슬로우……. 어떤 장면과 이미지는 그렇게 당신의 기억을 표본하고, 이로써 당신의 화양연화는 아름답게 간직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또 다른 의문을 당신에게 던진다. 차우는 리첸에게 자기 부인이 똑같은 핸드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리첸은 차우에게 자기 남편에게도 똑같은 넥타이가 있다고 말한다.

차우와 리첸은 고독을 공유함으로써 그들만의 세계를 이룩한다. 그리하여 내게 남은 단 한 장의 순간이 있다. 리첸이 손수건을 만지작거릴 때, 그녀가 계단 위를 바라볼 때, 빗방울이 떨어지며 짓는 번들거리는 바닥의 무늬와 멜로디는 어느 누구도 아프지 않다는 위로와 같았다.




감독: 왕가위
주연: 장만옥, 양조위






채어린
자유기고가


*본 내용은 지난 2024년 11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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