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 기술이 아니라 입지에서 시작된다
검색 입력폼
칼럼

산업은 기술이 아니라 입지에서 시작된다

문정기, 공학박사, 과문융합연구소 소장

[GJ저널 망치] 산업정책은 흔히 기술 경쟁의 문제로 설명된다. 그러나 산업의 성패는 기술 이전에 이미 입지와 조건에서 상당 부분 결정된다. 산업은 공중에서 자라지 않는다. 반드시 특정한 공간 위에 내려앉고, 그 지역이 지닌 자원과 사회적 기반 위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은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날 반도체 공장은 단순한 제조시설이 아니다. 막대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 초순수 생산 설비, 고속 물류망, 숙련된 인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도시 기능까지 결합된 거대한 사회적 인프라다. 이런 조건 없이 기술만으로 공장의 입지를 결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수도권 남부가 반도체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것도 시장 논리만의 결과가 아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산업 기반과 공공 인프라, 국가의 집중 투자, 도시 기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첨단 산업은 결국 사회적 토대 위에서만 성립한다.

반면 말 산업은 전혀 다른 경로를 따른다. 말 사육과 승마 산업은 넓은 토지와 쾌적한 환경, 지역 공동체의 수용성, 그리고 문화적 기반에 크게 의존한다. 이 산업은 무한한 확장이 가능한 구조가 아니다. 지역사회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이를 국가 차원의 핵심 성장 산업으로 확대하려 하기보다, 지역 특화 산업으로 육성하는 접근이 보다 현실적이다. 이는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산업마다 요구하는 조건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산업은 양극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일부 산업은 초대형 인프라를 기반으로 특정 지역에 집중되고, 다른 산업은 지역 기반 위에서만 유지된다. 정책의 역할은 모든 산업을 동일한 방식으로 확대하는 데 있지 않다. 산업의 성격에 맞게 규모와 역할을 구분하고, 그에 맞는 공간을 설계하는 데 있다.

지역개발 역시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외부 산업을 유치하는 것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 물과 교통, 인력, 산업의 축적된 경험, 공동체의 생활 방식까지 포함한 지역의 총체적 자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 위에서 비로소 적합한 산업을 설계할 수 있다. 결국 지역 발전의 출발점은 고대의 격언처럼 “너 자신을 알라”는 데 있다.

국가 경쟁력은 새로운 산업을 얼마나 많이 도입했는가로 결정되지 않는다. 각 지역의 조건에 맞는 산업을 얼마나 공정하게 선택받고, 적절한 지원을 받는가에 달려 있다. 산업정책은 기술 경쟁을 넘어, 어떤 사회와 어떤 공간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문정기, 공학박사, 과문융합연구소 소장
전 광주테크노파크원장과 장관급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국책연구소와 대학에서 정책 및 연구 업무를 수행했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키워드 : 문정기 박사

    오늘의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