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초대석> 박맹수 원광대 전 총장, “동학은 내 분신이자 자기 치유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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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특별초대석> 박맹수 원광대 전 총장, “동학은 내 분신이자 자기 치유의 길이었다”

5월 광주항쟁의 죄책감이 내 동학 연구의 출발점
전남 화순은 동학농민혁명의 알파이자 오메가
K-컬처의 뿌리에는 한국적 휴머니즘, 곧 동학 정신이 있다
남도의 한을 풀어 흥과 신명의 땅으로 바꾸는 데 남은 힘을 쏟고 싶다

[GJ저널 망치] 동학 연구에 평생을 헌신해 온 박맹수 전 원광대학교 총장을 GJ저널망치 특별초대석에 모셨다. 본 인터뷰에서는 동학 사상과 동학농민혁명 연구를 통해 축적된 학문적 성과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동학의 가치와 의미를 조명한다. 특히 호남 지역의 영성 전통과 결합된 동학의 사상적 유산, 자기 치유와 역사 인식의 문제, 그리고 남도와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인문학적·철학적·영성적 통찰을 심층적으로 담아냈다.<편집자 주>

▲ 45년 한길, 발로 써온 동학 연구
저 자신을 45년 동안 동학에 미쳐 한길을 걸어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동학은 책상 앞에만 앉아서 할 수 있는 연구가 아닙니다. 현장을 직접 찾아가야 하고,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사료를 하나하나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1983년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걸었습니다. 40년 넘게 걷다 보니 주변에서 저를 두고 “발로 하는 동학 연구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제 삶과 연구의 중심에는 늘 동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출발점에는 단순한 학문적 관심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비극을 목도하며 생긴 죄책감, 그리고 우리 역사에 대한 절실한 문제의식이 함께 있었습니다.

▲ 원불교에서 동학을 만났고, 5월 광주를 거치며 동학은 내 삶의 과제가 됐다
처음 동학이라는 이름을 깊이 의식하게 된 것은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경전을 배우는 과정에서 큰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께서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 등 동학의 지도자들을 위대한 선지자로 높이 평가하신 대목을 접한 것입니다. 타 종교의 인물을 이처럼 깊이 존중하고 기리는 사례는 흔치 않기에, 그 경험은 제게 동학을 새롭게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동학을 평생 연구하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제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군 복무 시절과 5월 광주였습니다.

저는 1979년 장교로 임관해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부마항쟁과 이어진 광주항쟁으로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저는 제 의지와 무관하게 계엄군 체제 안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시민과 대학생들이 희생되는 역사적 비극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광주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그 시대에 계엄군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제 삶에 깊은 흔적으로 남았고, 이후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남았습니다.

제대 후 광주에 계신 친척 어른들을 찾아가 당시 상황을 조심스럽게 여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침묵했습니다. 그 침묵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상처였고, 저는 그 무게를 깊이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원불교 교역자의 길에 들어선 저는 1982년 익산에서 후배들과 함께 야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며 현실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광주의 비극이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근현대사의 왜곡된 전개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 근원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좌절과 같은 역사적 단절이 자리하고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스스로의 무지와 한계를 절실히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분명해졌습니다.

결국 제 동학 연구의 출발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대학 시절 원불교를 통해 접한 동학에 대한 인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5월 광주에서 계엄군 편에 서 있었던 가해자로서의 죄책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동학 연구를 통해 어떤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 5월 영령들이 제게 남긴 질문과 과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태백산맥』은 내게 잊고 있던 고향 벌교를 되돌려주었다
제 고향은 전남 보성 벌교읍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제게 늘 “막내아들 덕분에 집안이 한 번 풀렸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기대를 안고 저를 서울로 유학 보내셨고, 그 과정에서 논밭까지 파셨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향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원 시절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지명과 정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두 제가 어릴 적 부모님과 동네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며 잊고 있던 고향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그 뒤 명절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 동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집안 어른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와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자본론을 가르친 분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는 개인의 삶과 고향의 기억이 결국 한국 현대사의 격동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 화순을 빼고 동학혁명을 말해서는 안 된다
화순 양복사에서 동학 강의를 하면서 새삼 절감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화순이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 역시 강의 요청을 받기 전까지는 화순이 이토록 중요한 곳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깊게 알지 못했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며 자료를 다시 살펴보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2023년 5월 18일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때, 결정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자료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화순 출신 동학군 지도자 한달문 선생의 한글 편지였습니다.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남겨졌고, 무엇보다 혁명의 주체가 직접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컸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집강소입니다. 전봉준 장군이 화순에 와서 직접 개혁 활동을 지도했고, 그 장면을 일본인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핵심 현장이 바로 집강소이고, 그 대표적인 공간이 오늘의 화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화순은 당시 능주목, 화순군, 동복현 세 고을이 합쳐진 곳입니다. 그래서 동학에 대한 자료도 풍부하고, 사람들의 희생도 컸습니다. 일본군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학살이 자행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화순을 빼고 동학혁명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화순은 동학농민혁명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호남은 인문정신과 저항정신이 함께 살아온 땅이다
제가 오랫동안 광주·전남·전북 일대를 다니며 느낀 것이 있습니다. 우리 남도는 인문정신이 매우 깊이 뿌리내린 지역입니다. 학문을 많이 하지 않은 분들조차도 삶의 태도와 말 속에서 깊은 인문적 감각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이러한 깊은 인문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외세의 침략과 부당한 권력의 억압을 받게 된다면, 그 결과는 자명합니다. 결국 저항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저는 남도를 인문의 고장이자 저항의 땅이라 부릅니다. 특히 격동의 시대일수록 위대한 어른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저는 그분들을 ‘영성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불교 쪽으로는 곡성 출신 전강 대선사, 영광 출신 백용성 스님, 해남 출신 초의선사 같은 분들이 떠오릅니다. 기독교 쪽으로는 외래 선교사가 중심이 된 엘리트 기독교가 아니라, 이 땅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중적 기독교 전통이 있습니다. 그 대표가 바로 이세종 선생입니다.

저는 이 흐름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여기에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 대종교의 홍암 나철 선생까지 함께 놓고 보면, 호남의 영성사는 종교가 달라도 결국 삶의 실천과 자기 헌신이라는 점에서 서로 깊이 통합니다.

박맹수 전 원광대 총장이 화순에서 동학 인문강좌 마지막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 한국 영성의 핵심은 가장 낮은 사람을 가장 거룩하게 보는 데 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적 영성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가장 거룩하게 보는 태도입니다.

해월 선생은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며느리 뱃속의 생명까지도 하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사람 하나하나를 절대적인 존재로 본 것입니다. 이세종 선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낮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저는 영성가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하는 것, 그들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존재라고 믿는 것. 예수의 삶도 결국 그렇지 않습니까. 감히 말씀드리자면, 한국 기독교인 가운데 예수처럼 산 분을 꼽으라면 저는 이세종 선생을 꼽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영성이 수입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영성가들은 외부 사상을 그대로 들여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역사와 문화, 민중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난 분들입니다. 저는 한국적 영성의 가장 큰 특징을 자생성과 토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 K-컬처의 뿌리에는 동학의 휴머니즘이 살아 있다
오늘날 K-컬처의 세계적 확산도 결국 한국적 휴머니즘의 힘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크게 유행했을 때, 일본 시민운동가들에게 왜 그렇게 그 작품에 빠졌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 드라마에는 없는 휴머니즘이 거기엔 들어 있다.”

저는 그 말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한국 드라마와 문화 속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와 존중, 관계의 따뜻함이 살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에서부터 동학의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정신으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신은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음식까지 모두 스며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치만 봐도 그렇습니다. 수많은 재료가 함께 어우러져 발효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 음식이 됩니다. 저는 그 다양성과 조화, 생명성이야말로 한국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 세대에게 자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K-푸드, K-컬처, K-민주주의를 자랑하지만, 그것을 떠받치는 뿌리 사상과 철학도 알아야 한다고. 저는 그 뿌리가 되는 사상과 철학을 19세기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 바로 ‘동학’이라고 생각합니다.

▲ 계엄을 막아낸 시민정신은 동학의 ‘사람이 하늘’과 정확히 통한다
최근 우리 사회가 겪은 계엄 위기와 그것을 시민이 막아낸 장면을 보면서, 저는 동학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국회 앞에서 장갑차와 총을 든 군인들 앞에 서 있던 시민들, 특히 젊은 여성들을 보면서 저는 정말 가슴을 졸였습니다. 저는 1980년 계엄을 경험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저 군인들이 발포하면 끝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군과 경찰 내부의 소극적 저항도 보였습니다. 물론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갈등이 현장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들이 “내가 별 힘은 없어도 나라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거리로 나왔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동학의 핵심과 통합니다. 동학은 “네가 하늘이다”, “네가 역사의 주체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개인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 그 출발점이 바로 동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신은 3·1운동부터,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촛불혁명을 거쳐 오늘의 빛의혁명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다시 동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젊은 세대도 동학의 에너지를 직감하고 있다고 느낀다
제 딸과 그 또래 청년 시민운동가들에게 동학혁명 현장 답사를 안내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바쁘고 현실이 급한데 무슨 동학 답사냐는 반응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2박 3일로 함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이후 남태령에서 전봉준투쟁단이 막혔을 때, 그 답사에 참여했던 젊은 친구들이 자기들의 네트워크와 SNS를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현장을 연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갑오년에 넘지 못했던 고개를 오늘의 시민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넘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이제 우리 세대에도 동학혁명의 바람이 불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저는 동학이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에너지로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 동학 연구는 내 자기 치유이자 호남의 자기 치유다
이제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분명해지는 생각이 있습니다. 남은 힘을 제 고향, 제 탯자리인 남도 땅에 쏟고 싶다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제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동학에 매달렸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동학은 제 분신이었습니다. 광주와 연결돼 있었고, 남도의 비극과 연결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좌절과 탄압 속에서도 저는 이 연구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남도는 동학혁명 과정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땅입니다. 우금치 이후 밀려난 동학군이 전라도 서남해안으로 몰려와 장흥, 강진, 보성, 해남, 진도 등지에서 대규모로 학살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진실은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와 왜곡된 근현대사가 그것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학 연구를 단순한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 분신 같은 역사의 자기 치유 과정이고, 동시에 우리 호남 근현대사의 자기 치유 과정입니다.

저는 자기 치유라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남이 밖에서 치유를 던져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쌓인 상처와 트라우마가 우리 힘으로 녹아내릴 때 비로소 진짜 치유가 완성됩니다.

저는 그 치유가 이루어질 때 남도가 한의 땅을 넘어 흥의 땅, 신명의 땅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남도 사람들이 더 신명나게 살 수 있도록, 저는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쏟아붓고 싶습니다.

▲ 광주·전남에서 다시 살아나는 동학의 흐름을 보며 큰 희망을 느낀다
요즘 저는 광주와 전남에서 다시 동학의 흐름이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양복사 동학 강의 이후 이 지역을 찾는 일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장흥에서도 동학 이야기를 했고, 광주 시민자유대학에서도 강좌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흐름이 아주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공부한 동학 이야기를 남도 땅에서 다시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도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지금 광주와 전남, 남도 땅에서 새로운 기운이 올라오고 있다고 느낍니다. 저는 그 흐름이 참 반갑고, 또 즐겁습니다.
김지유·정채하 gjm200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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