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에게 고백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해찰> 할 수 없을 것이었어. 열정은 땡볕에 지쳐버렸고, 텍스트의 이면(裏面)은 강제된 풍경과 체험된 이성(理性)의 혼돈을 은근히 부추기기 때문이었지.
특히나 이 영화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nomad)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철학의 개념이 된 지점으로부터 출발했거든. 이 책에서 들뢰즈는 노마디즘(nomadism)이라는 용어로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서 ‘어떤 목표를 좇는다’고 통찰했는데,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의미로 설명했지.
영화 <노마드랜드>의 인물들을 만난 순간, 나는 속살에 물방울이 돋은 듯 서늘한 우울을 겪고 말았어. 아마도 내가 오래된 떠돌이기 때문이었을 거야. 계절이 바뀌면 또 어디론가 주소를 옮겨야 하는 내가 ‘노마드’들을 바라보는 일은 그렇듯 태연자약 할 수만은 없었지. 일찍이 고향을 떠나왔으며, 살림살이를 수없이 옮겨 다녀야 했지. 그런 만큼 직업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기억하는 게 괴로울 지경이니 말이야. 새 주소를 구하지 못한다면…… (너무 끔찍한 일이지만) 펀(fern)과 같이, 밥 웰스가 운영하는 RTR(노마드생활자훈련소)를 찾아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르거든.
“홈리스(homeless, 노숙자)가 아니라 하우스리스(houseless)일 뿐이란다.”
이제부터 소개할 나의 친구 펀, 그녀는 네바다주의 ‘엠파이어’라는 곳에 살았지. 하지만 지역경제를 담당했던 기업의 도산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남편마저 여읜 그녀는 황폐해진 삶의 터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됐어.
![]() |
펀은 가족을 지탱해주던 한때의 살림 도구들을 어느 창고에 맡기고서 길을 떠나는데, 이제 그녀의 주소는 뱅가드(vanguard, 선봉/전위)라는 별명을 가진 자동차로 ‘벤’이야. 그런데 당신이 그녀를 보면 친근함을 느끼게 될까. 언젠가 한 번쯤은 당신 곁은 지나쳤을 사람처럼 말이야. 지인의 딸의 물음에 하우스리스(houseless)라 대답해야 하는 펀에게는 이정표가 없어. 오직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이 세상 어디든 달려가야 할 절체절명의 떠돌이가 된 거야. 일자리를 구해 당장의 생활을 꾸려나가지만 일터는 잠깐 머물렀다가 곧 떠나야 하는 여정일 뿐이야.
또한 그녀에게 낮과 밤은 의미가 없어. 혼자서 식사를 하고 머뭇거리는 순간들도 혼자야. 무엇을 해야 할지 걱정스럽지만 일상적인 습관이 조금 남았을 뿐. 암울한 미래조차 고립보다는 한결 가벼워 보이는 건 그녀의 현실감각이 즉물성(卽物性)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유일 거야.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 다만 그럴 뿐이지. ‘길바닥 생활’이란 으레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차라리 펀은 평온한 얼굴인데…….
당신은 과연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가. 진부한 물음일지라도 다시 묻는 건 당신이 대단히 창조적인 인물일 거라 믿기 때문이야. 당신의 이름과 직업과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몇 개의 자물통과 열쇠를 가진 완벽한 현대인이라는 확신, 그리하여 지금쯤 삶을 즐기기 위해 멋진 여행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호모 노마드』인 당신. 즉 자크 아탈리는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착민의 역사가 아닌 노마드의 역사에서 그 해답을 찾았는데,
정주성(定住性)의 인류사가 다시 유목(遊牧)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통찰한 거지. 도시 유목민, 여행자 등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들이 넘쳐난다고 말이야.
그러므로 노마드의 영토를 확장시킨다면 당신도 곧 노마드생활자라는 거지. 그런데 당신은 생활을 위해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까. 이때의 떠돌이는 각설이나 집시처럼 사회가 허용치 않은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 번쩍거리는 구두와 멋진 섹션들을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혹은 낡고 헤진, 굽이 닳은 신발을 신었을지라도 그들은 울타리 안팎을 우주의 항체처럼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지.
그렇다면 <노마드랜드>의 그들은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일까. 멋진 추억과 우정의 포옹과 한없는 공감력을 가진 사람들 말이야. 펀은 '길바닥 생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수많은 떠돌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동병상련의 친구들과 함께 이제 완벽한 떠돌이가 된 펀.
한편, 당신의 집, 지붕과 온돌은 오늘도 안녕하겠지. 가스레인지는 여전히 푸른 불꽃을 피워낼 테고, 창밖으로는 이제 가을이 다가오겠지. 서늘한 공기가 구름 빛에 어려 멋진 풍광을 자아내는 동안, 펀은 수많은 떠돌이들과 함께 모닥불 앞에 붉어진 얼굴들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지난했던 편린들을 나누지.
![]() |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여관으로 이사 오기 전에 일자리를 찾아 지원서를 많이 냈었어. (…)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갔었지. 자살까지 생각했어. (…) 나이는 62세가 다가오는데, 사회보장 보조금을 알아봤더니 550달러라더군. (…) 난 평생 일했어. 12살부터 일했어.……그런데 믿을 수가 없더군.”
또 한 사람의 사연은 이러했어.
“20년간 일했습니다. 제 친구 빌도 함께 일했습니다. 빌이 간 기능장애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인데 회사의 인사과에서 전화가 왔어요. ‘당신 퇴직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라는 거예요. 빌은 10일 후에 죽었어요. (…) 빌이 죽기 전에 말하더군요. ‘시간을 낭비하지 마, 머들.’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퇴직했어요.”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이런 생활방식이 마음에 들었어요. 자유와 아름다움, 땅과 연결된 생활이죠. 하지만 공짜는 없어요. 자신의 용변처리법은 알아야 해요.”
그녀가 쓸모에 따른 통 사용법을 설명하자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리지.
그리고 모닥불 가에 모인 사람들은 노래하지.
우리 벤을 타고 다시 한 번도 안 가본 곳으로 가네.
그런 곳으로 간다네. 빨리 우리의 벤을 타고 싶어.
다시 러버 트램프로 집시 밴드처럼 우린……
멋지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황야의 밤을 보낸 그들은 또 다른 길을 향해 떠나지. 펀과 친구 몇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가지만 그들을 기다려주는 일터는 없어. 황량함만 자아내는 애리조나의 선인장 너머로 저녁 빛은 아름답지만, 세탁방에서 빨래를 하는 펀은 차라리 무표정이야.
![]() |
펀의 친구, 스웽키를 나는 특별히 기억해. 펀의 벤이 펑크가 나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충고하지. “여기에서 죽을 수도 있어. 여긴 황야라고!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이해 못 하겠어?”
스웽키는 자신이 폐암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죽음마저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그녀. “……생각해봐야 할 것도 있겠지만, 더 이상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그건 싫어.”
그녀는 75세의 나이로 멋진 죽음의 레시피를 꿈꾸는 여자야. 콜로라도 호수의 카약과 크고 작은 펠리칸들, 커브를 돌면 수백 마리의 제비가 집을 짓고 사는 절벽이 나오고, 천지에 가득 날아다니는 제비 떼와 함께 “내 인생은 완전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삶과 죽음을 깨달아버린 스웽키. “내가 죽으면 친구들이 모닥불 주위에 모여, 날 추모하기 위해 불 속에 돌을 던질지도 모르지.”
스웽키는 펀의 손에 돌멩이 하나를 건네주며 아득한 시선으로 또 말하지. “뭔가 멋진 게 보여.”
트레일러를 매단 스웽키의 벤이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된 펀은 오래된 사진첩을 들추지. 표정 없던 얼굴에 표정이 생기는 일. 추억은 그토록 친근한 걸까. 웃음을 짓게 하고, 한숨짓게 하는 순간도 슬그머니 지나버리지만 말이야. 그리고 어느 협곡에 다다른 펀은 벌거벗은 몸을 작은 못에 맡기는데,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몸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표현한 것처럼 보여.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고 또 옮겨 다녀야 하지만, 아름답고 비루한 인간의 풍경들을 수없이 지나치지만, 고독할 틈도 없이 먹어야 하고, 싸야 하고, 쉬어야 하고, 또 깜짝 놀란 듯 깨어나야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순간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2
영화 <노마드랜드>는 제시카 브루더(Jessica Bruder)가 쓴 논픽션이 원작이야. 펀을 연기한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제작과 기획을 맡았는데, 중국 출신 클로이 자오에게 감독을 맡겼지. 클로이 자오는 이 영화를 통해 노마드의 삶을 해석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특출함일지도 몰라. 고찰(考察)하는 영화의 ‘펀’이라는 인물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만들어진 캐릭터인데, 그녀의 불가피한 삶의 여정을 멀찍이 바라보듯 뒤쫓는 영상 때문에 다소 덤덤하게 보이는 한 영화였어.
하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논픽션의 실제 인물이라는 게 이 영화의 특별함일 거야. 논픽션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영화 때문에 오히려 당신이 불안에 빠질까 봐 걱정이야. 당장에 놓친 일과가 갑자기 떠올랐다든지, 혹은 당신의 심장을 채근하는 무엇으로 전전긍긍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당신의 휴식을 위해 다가오는 순간이 있으리라 믿어. 펀이 선택한 길 위의 삶은 또 다른 길 위의 삶을 위한 동행의 불가피함 때문일 테니까. 그래서 펀은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순간처럼 셰익스피어의 시, <소네트 18>을 황야를 변주로 삼은 걸지도 모르니까.
내 그대를 한여름 날에 비할 수 있을까?
그대는 여름보다 더 아름답고 부드러워라.
거친 바람이 5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여름의 빌려온 기간은 너무 짧아라.
때로 태양은 너무 뜨겁게 내리쬐고
그의 금빛 얼굴은 흐려지기도 하여라.
어떤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쇠퇴하고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고운 치장을 빼앗긴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
죽음도 자랑스레 그대를 그늘의 지하세계로 끌어들여
방황하게 하지 못하리.
불멸의 시구 형태로 시간 속에서 자라게 되나니.
인간이 살아 숨을 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이 시는 살게 되어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라.
펀의 친구들은 모두 새로운 인생을 위해 제각각의 길로 떠났지. 떠돌이들―린다, 스웽키 그리고 데이브……, 그들이 펀에게 남긴 건 돌멩이였는데, 그들은 왜 미지의 삶을 돌멩이로 비유한 걸까. 하지만 나는 애써 해석하고 싶지 않아. 당신의 직관이 풀어낸 의미가 있다면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하겠어. 그들 또한 당신의 친구일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영화는 각인하듯 RTR의 지도자 밥 웰스의 목소리를 덧붙이지.
“내가 이 삶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마지막 작별인사가 없다는 겁니다. (…) 항상 이렇게 얘기하죠.”
―길에서 만나요!
![]() 감독 클로이 자오
출연 프란시스 맥도맨드(펀) |
채어린 자유기고가
*본 내용은 지난 2021년 9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2025.12.07 (일) 1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