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찰] 텅 빈 세계의 물방울소리…… 그리고 비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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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찰] 텅 빈 세계의 물방울소리…… 그리고 비밀노트

영화 <패터슨>

[GJ저널 망치]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지만 새삼스러운 일상이란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하루이지. 오늘의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도 당신과 나와 다를 게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지. 그는 ‘패터슨’이라는 도시에서 사는데 ‘패터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버스운전사야. 그는 매일 아침 여섯 시를 조금 넘겨 눈을 뜨고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하지. 직장의 동료와 안부를 나누고 버스를 운전하는 패터슨. 그는 틈틈이 시―비망록과 같은 메모―를 쓰고 퇴근해서는 아내와 저녁을 먹으며 하루의 일들을 이야기하지. 그리고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 동네 바에서 맥주 한 잔으로 일상과 작별하는 패터슨.

정해진 버스 노선처럼 비슷한 날들. 마주치는 사람들이 다르고, 매일의 풍경도 달라 보이지만 ‘새삼스러운 발견’처럼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는 날도 있지. 이 영화를 만든 짐 자무시 감독은 말하지. “삶의 아름다움이란, 대단한 사건이 아닌 소소한 것들에 있다”고. 과연 자잘한 무늬와 같은 삶에 대해 시를 쓰는 사람은 무엇을 꿈꾸는 걸까.

사랑 시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항상 손이 닿는 곳에 있다
오하이오 블루 팁이다
하지만 전에 좋아했던 성냥은 다이아몬드다
그건 우리가
오하이오 블루 팁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성냥들은 확성기 모양의 글씨가 쓰인
흰색 상표와 진한 청색의
튼튼하고 작은 성냥갑에 잘 포장되어 있다
마치 세상에 대해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이야
3.8cm 길이의 오돌토돌한 암자색 머리에 덮힌
연한 소나무 성냥개비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집요하게
첫사랑 여인의 담배에 불을 붙일
준비가 됐다“

― 시(詩)는 과연 그에게 무슨 소용이었던 걸까.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담아내고 있는 영화는 틈틈이 패터슨이 시를 쓰는 장면을 보여주지. 패터슨은 시인이야. 그가 가진 비밀노트는 버스 운전을 하며 만나는 도시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사람들을 발견하는 일종의 비망록인 셈인데, 영화는 일주일 동안 살아가는 패터슨을 담담하게 비춰줄 뿐이야.

― 일주일 동안 그(그녀)는 그렇게 살았다!

짐 자무시 감독이 영화로 시도한 <말 걸기>가 이토록 단순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볼 수밖에! 그리고 당신의 지난 일주일은 어땠는지?

너무 평이해서 도리어 불안해 보이는 영화, 분쟁과 폭력의 관성에 길들여진 관객이 <패터슨>을 ‘순진하게’ 견디며 지켜볼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힘이 이 영화를 강요할 수 있는 걸까. 시(詩)는 왜 그토록 운율에 집착하는 걸까. 갈등 없이 서사가 가능하다면 ‘누구나’의 장편소설이 바로 일상이겠는데. 당신의 서사를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면 어느 단면만을 편집하고 싶을 텐데 말이야. 진부한 캐릭터를 들키고 싶지 않을 테니까. 도려낸 일부가 은유(隱喩)를 얻으면 시가 될 테니까 말이야.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놓쳐서는 안 될 시퀀스 별 상징들이 있어. 바뀌는 캐릭터이지만 네 ‘쌍둥이’들은 패터슨의 내면을 드러내는 메타포인 셈이야. 그러니까 쌍둥이들은 진부하고도 기계적인 하루하루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기력의 징후가 만들어낸 패터슨의 양가적 자아라고나 할까.

또 유난히도 흑백무늬가 많이 나오지. 이는 그림자처럼 대위관계(代位關係)를 암시하는 것 같아. 그리고 패터슨이 매일 밤마다 찾아가는 바의 이름은 , 직역하자면 ‘그림자 술집’인 거야. 그림자는 대상의 어둠을 혹은 감춰진 측면을 비유한다고 볼 때, 패터슨의 내면갈등을 구체화해서 보여주는 장면인 거야.

패터슨이 매일 들르는 SHADES BAR에는 체스게임에 빠진 인물이 여럿 등장하지. 특히 주인인 <그>는 늘상 바에 놓인 체스판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데,

주인장 : 오늘은 지겠군.
패터슨 : 누구랑 하는데요?
주인장 : 나 자신!

영화의 체스는 내적 갈등의 메타포가 아닐까. 시를 쓰는 버스운전사와 일상에 갇힌 두 패터슨이 양립하면서 자신의 굴레와 싸우는 건 아닐까?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면 어제와 닮은 또 하루가 지나가는 거였어.

“오늘 어땠어?”
“똑같았어.”

패터슨은 집을 나설 때마다 비뚜름해진 우체통을 바로 세우지. 왜? 바로 세워놓지만 늘 기울어져 버리는 우체통을 향해 그는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 다만 바로 세우는 지난한 일만이 그가 대하는 삶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우체통으로부터 어떤 소식을 접하는 경우도 없었어. 우체통은 거기 세워져 있고 매일 지나쳐가는 메타포는 차라리 슬픔이었다고 말하면 당신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주길 바랄 뿐.

패터슨의 아내는 유난히도 동그라미 무늬에 집착하는 듯 보여. 커튼에도 손수 만든 컵케이크에도 그리고 집 안 곳곳에 동그라미 무늬를 그려놓았지. 하지만 애써 동그라미 무늬에 대해 해석하고 싶지는 않아. 동그라미는 그냥 동그라미일 뿐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의미를 담아내는 기호일 수도 있어. 나의 조심성은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메타포 가운데 가장 소극적인 부분이기 때문도 아니야. 동그라미는 폭포의 대위에 놓고 생각해보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야. 그러니까 퇴근길에 만난 여자아이가 쓴 시의 제목이 「Water falls(폭포 Waterfall)」인데,

물이 떨어진다
밝은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다
찰랑대는 머리칼처럼 떨어진다
어린 소녀의 어깨 위로 떨어진다

물이 떨어진다
아스팔트에 웅덩이를 만들고
구름으로 더러운 거울을 만든다
우리 집 지붕에 떨어지고
엄마와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그걸 ‘비’라 부른다

폭포를 바라보며 휴식을 즐기는 패터슨은 좀체 마음을 표정으로 바꾸는 데에는 서툴러 보여. 하지만 그는 여자아이와 대화하며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이 여자아이도 쌍둥이였는데, 시를 쓰는 여자아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직접적인 교감을 나눈 장면이라고나 할까. 말하자면 폭포는 곧 패터슨의 내면이 확장되는 유일한 장소인 거야. 아내가 그리는 동그라미와 수직의 맹렬함을 가진 폭포는 서로에게 긴장을 요구하는 메타포로 작동하는 거였어. 이때 패터슨의 휴식은 시(詩)에 머물지 않은 것처럼 보여. 요컨대 그가 무위(無爲)에 자신을 맡기는 온전한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보았던 거야.

이 영화에서 극적인 갈등과 사건의 주인공은 ‘마빈’이라는 이름의 애완견이야. 아내와 그 사이에 번번이 이물감을 드리워놓는 개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가 될텐데, 상투적이어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 슬그머니 객관화를 부여해주는 메타포. 패터슨과 마빈은 함께 살아가는 집에서 매번 조용한 갈등을 겪지만 결코 충돌하지 않지. 바깥세상과 충돌하지 못하는 그의 성실성이 그러하듯이 말이야.

―시(詩)는 여전히 패터슨을 구원해줄 수 있을까.

컵케이크로 얻은 소박한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패터슨과 아내는 영화를 관람하지. 그리고 돌아온 집에서 맞닥뜨린 건 패터슨의 일상이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었어. 마빈이 비밀노트를 찢어발겨버린 거야. 하지만 패터슨은 역시나 무덤덤한 얼굴로, 이미 단련된 박탈감으로 아무런 표정조차 지어내지 않지. 노트의 언어들은 이제 언어를 잃어버린 쓰레기가 돼버렸는데도 말이야. 일상의 상실이 그를 크게 절망시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놀라우리만큼 지독한 평범을 유지하는 거였는데, 순간, 나는 그토록 처연한 얼굴을 가진 그가 두려웠어. 갈등과 분노로부터 폭발하지 않는 지독한 인내의 힘.

아내에게 자신의 글을 한 번도 읽어주지 않았던 패터슨. 그는 정작 시를 쓴 것일까. 아니면 시를 빙자한 토로일 뿐이었을까. 들키고 싶지 않은 내밀한 것들의 향연은 비망록이어서 어느 때엔가는 폐기해야 될 불순한 저작행위였다고 스스로 국한해버린 건 아니었을까. 비밀노트를 항상 소중하게 간직하던 패터슨은 그날 밤 노트를 방기하지. 그렇다고 산산조각 내는 마빈의 행위를 유도한 것을 아닐 테지만 결국 그는 비밀노트를 잃고 침잠에 빠지는 듯 보이지.


패터슨은 자신의 욕망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사람일지도 몰라. 사랑하는 아내와의 생활에서도 자신의 주장 따위를 피력한 적이 없어. 아내의 작업들―무늬를 그리거나,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꿈을 가진 그녀에게나, 그리고 컵케이크로 돈을 버는 일에 대해서도 그는 감정을 극도로 통제하지. 회사에서의 동료와의 대화에서도 그저 상투적인 대꾸에 불과한 말만 하는 그는 자신의 출구로는 고작 ‘폭포’와 대면하는 게 유일한 불가항력인 존재, 그래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아를 일찌감치 깨달아버린 것일까.

요즘은 걸핏하면 비가 내리고 미세먼지로 혹독한 봄날이지만, 그래도 봄날은 가는군. 당신의 봄날은 어땠는지. 나에게도 사소한 일들이 지나갔고 어떤 일들은 필름의 단면처럼 기억이 떠오르기도 해. 하지만 그러한 일들도 어언 계절이 바뀌면 퇴락해버리겠지. 늘 그랬으니까. 그런 게 삶이고 저항할 수 없는 시간의 권력이니까. 그래도 나는 안간힘으로 간직할 만한 추억을 지닌 사람이어서 올 봄의 기억 하나를 적어볼게.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어. 비가 온 다음이어선지 바람도 햇볕도 참 상냥했지. 낡은 구두를 신은 나는 보도를 밟으며 되도록 소리 없이 걷고 싶었지. 그리고 한적한 곳에 이르렀어. 나무들은 신록이 더해지고 하늘은 마냥 푸르렀는데, 어느 순간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내려오는 거야. 그때에서야 나는 발견했지. 지렁이를 찾아낸 새는 먹이를 보고 내려온 거였어. 잠시 새는 겅중거리기만 하더니 슬쩍 나의 눈치를 보는 흉내를 내더군.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새의 하는 짓(?)을 관람했는데, 녀석이 곧 지렁이를 먹어치울 거라고, 그리곤 또 훌쩍 날아갈 거라고 말이야.

달리기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선
수많은 분자들을 뚫고 지나간다
양쪽으로
더 많은 분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앞 유리 와이퍼에서
소리가 난다
비가 멈췄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영화는 조용히 흐르지. 당신의 하루하루…… 아내의 커튼, 의상, 소파, 식탁, 벽, 장식, 가구, 쿠키, 할리퀸 기타…… 들도 흘러가지. 패터슨이 걸어가는 길에서, 계단에서, 승객들, 달리는 버스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들도 흘러가지. 그런 것들은 일상이 그러하듯 매일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 하지만 시인의 눈은 똑같으나 조금은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데,

다른 것

어렸을 때 3차원이 있다는 걸 배운다
높이와 너비, 길이
구두상자 같다
나중에 4차원이 있다는 얘길 듣는다
―시간

어떤 사람은 5차원, 6차원, 7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일을 끝내고 바에서 맥주를 마신다

“일을 끝내고 바에서 맥주를 마신다”라고 쓰는 패터슨. 그는 “평범”에 길들여지는 자신을 위해 시(詩)의 숨을 터놓는 건 아닐까.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시처럼 신비롭고 다양하고 아름다운가를 보여주려는 영화는 아닐까. 하지만 시는 혁명가도 뛰어난 의사도 나아가 산책길에서 만난 참새가 지렁이를 담고 하늘을 나는 자유도 될 수 없다는 것. 아니야. 그 모든 걸 가능케 하는 “서정”의 세계는 위대함을 견인하는 힘으로써 시(詩)일지도 모른다고 말해야겠지.
하지만 패터슨과 아내가 외출에서 돌아온 밤, 애완견 마빈이 패터슨의 비밀노트를 완벽하게 찢어놓는 사건은 말 그대로 시(詩)가 사라진, 일상의 폐기에 다름 아닐지도 몰라. 그런데 시(詩)는 평범한 일상을 침입해오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지. 그리고 “평범”을 지키려는 패터슨의 엄정한 투쟁을 나는 다시금 생각해보는 거야.

혹시 선생님은 시인입니까?

폭포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있는 패터슨에게 다가온 일본인. 그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에 대해 묻지. 그리고 패터슨에게도 묻지. 당신은 시인인가요? 아뇨. 패터슨은 답하는데, 자신은 시인이었던 적이 없는 것 같은 거야. 버스운전사일 뿐 자신의 은밀한 기록들이 은유를 얻은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어. 떠나는 일본인은 그에게 선물을 남기는데,


―가끔은 빈 노트가 많은 가능성을 주죠.

여기에서 나는 고백할 수밖에! 빈 노트 앞에서 아연해지면서 외경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나! 짐 자무시 감독의 은밀한 비유는 그렇게 일상을 틈입해보려는 시도로써 이 영화를 만든 거야.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빈 노트 한 권을 선물해주고 싶어지는 거야. 시(詩)를 전해줄 수는 없지만 당신의 일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 커다란 여백이 한 방울의 잉크를 얻는 시간을 위한 사랑의 힘. 그런 걸 당신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자서전을 쓰는 것이다.” -해브록 엘리스

늘 그렇듯 일상을 살아가는 패터슨. 오늘 밤도 그는 마빈과 함께 산책을 하고 맥주 한잔을 마시고는 아내의 침대에 들 거야. 오늘 내가 그러하고 당신이 그러하듯이. 삶을 비켜가는 건 은유되지 않은 햇볕과 바람과 별…… 당신의 숨소리일 거야. 그리고 아직 쓰여지지 않은 위대한 시(詩)의 목소리……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흘러오는 물방울소리 같은…….



영화에 나오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1883-1963)는 『패터슨』 5부작 서사시로 써서 고향을 예찬한 시인이다.

소녀가 읽어주는 시(詩) 「물이 떨어진다(Waterfall)」는 짐 자무시 감독의 자작시라고.

감독 : 짐 자무시
출연 : 아담 드라이버, 골쉬프테 파라하니

<채어린 자유기고가>





*본 내용은 지난 2021년 6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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