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찰] 우리는 그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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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영화, 해찰] 우리는 그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다

트루먼 쇼

[GJ저널 망치] 당신(들)이 지극한 관심으로 매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 시시각각 당신(들)을 느끼지만 애써 태연한 척해야 하는 건 나로서도 고역이지만, 이미 익숙해져 버린 걸 깨달으면서 크나큰 애정에 감사하지.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말이야.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창시절과 청년기 그리고 또 많은 시간 동안 내가 <여기> 사는 동안 당신(들)도 <거기>에 살고, 살아가야 할 테니까. 그런 간격이 숲을 이룬다는 통찰은 이제 상투적이니까 말이야.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당신을 느껴. 그리고 당신 또한 나를 느끼고 있다는 것도 느껴. 내가 “알아채 버렸다”고 해도 부디 당신(들)의 신상에 변화가 없길 바라는 것도 여기에 적어둘게. 당신(들)이 가로등처럼 혹은 바람결과 같이 존재한다고 여겨왔다는 것도 고백할게. 그러면 모든 게 공평해질 테니까.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며, 모든 것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이렇듯 영원히 자신에게 신실하다. 매 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굴러간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세상은 고독할 새도 없이 저물어가고, 무슨 계시라도 기다렸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말하고 싶었지. 그만 높다란 담장 위에서 내려오라고. 하지만 당신(들)의 반응은 늘 침묵이었고 내겐 어떠한 변화도 이끌어 낼 만한 권능이 없었지. 다만 친절한 당신(들)의 미소를 떠올리거나 엊그제 피었다가 진 장미의 푸른 자국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들어가곤 했어. 어제와 비슷한 신문을 읽거나 티브이를 들여다보지. 손흥민의 멋진 슛 장면에 경탄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조금은 느긋해지려 노력하지. 그런데 신비로운 듯 가슴에 품은 꿈도 사치일까.

내 사랑……

영원히 꿈을 꾸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는 건 위대한 생명력일텐데. 당연하게도 당신(들)이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걸 짐작하는 건 사실 괴로운 일이야. 그러니까 멀미 같은 거 말이야. 그렇다고 이불을 둘러 쓴 채 평생을 살 수는 없는 거여서 나도 외출을 감행하지. 그리고,

Good morning, good afternoon and good night.
미리 인사하죠, 굿 애프터 눈, 굿 이브닝, 굿 나잇!

당신(들)의 화답은 늘 그렇듯 친절하고 얼굴은 상냥한 미소를 머금는다는 것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야 비로소 가능한 세계가 있다는 걸 나도 알게 됐거든. 하지만 내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그토록 나를 꿈꾸게 만들던 이름은 과연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그 또한 판타지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더는 의문하고 싶지는 않아.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이 그뿐일지도 모르잖아. 소중한 건 은밀해야 하니까.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 있지.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하는데, 옛날 로마 시대의 연극무대에서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다더군. 이때 배우들이 쓴 가면이 바로 페르소나인데, 훌륭한 배우는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배역을 잘 수행해야 하는 거지. 비극이든 희극이든.

그러면 <당신(들)의 쇼>는?

나는 과연 가면을 벗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지. 아니 가면을 벗을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는 역설을 생각해보기도 했지. 내가 가면을 벗어버리면 연극은 끝나야 하니까. 그러면 당신(들)도 가면을 벗어야 하는 위기가 닥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래서 내가 가면을 벗으면 안 되는 이상한 무대. 그런 세계를 당신(들)이 만든 건 아니겠지만.

평범함이 미덕인 게 당신(들)과 나의 은밀한 꿈이었을까. 사회성이 검증된 존재. 도덕과 규율로써 잘 교육받은 안심이 되는 이웃. 자칫 삐딱한 상황이 닥칠지라도 여분의 아량과 배려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친구들. 당신(들)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나는 일찍이 잘 알고 있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서로의 맨 얼굴을 마주할 기회를 얻지 못하겠지. 아무리 많은 악수와 포옹을 해도 당신(들)의 심장 근처엔 얼씬도 할 수 없겠지.


그래선지 나는 늘 외롭다고 느끼고 있어. 고독할 틈도 없이 사는 게 현대인이라지만 나는 가끔 내 얼굴의 거죽을 뜯어보기도 해. 새삼스런 고백이지만 나는 가끔 마스터베이션에 빠져들곤 해. 당신의 숨결이 그리울 때, 혹은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의 주검에 기함을 하고 돌아온 다음에. 그건 혐오와 경멸, 그리고 연민과 위로가 범벅된 감정의 토로였는지도 몰라. 그런 다음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나의 숨겨진 얼굴이 궁금해서 거울 앞에 서면 전혀 생소한 얼굴과 조우하게 되는 일.

그런 나날을 또 망각하며 보내곤 했지. 그러다가 문득 탄성을 지르곤 해. 내 사랑……. 깜박 잊고 말았던 나의 꿈의 저편. 그런 다음에 물밀져 오는 멀미. 그렇지만 다시는 놓치지 말자고, 그래서 먼 여행을 위한 각오를 하지. 내 사랑……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하지만 내 사랑……이 있는 곳은 너무나 멀고, 나는 당신(들)의 수천 수만의 시선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해야 하지.

그런데 <트루먼(Truman)>이라는 이름이 과연 내 이름일까. 이름조차 가짜는 아니었을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부르는 나의 이름은 무얼까. 당신(들)의 이름을 모르지만 혹 당신(들)의 이름이 <트루먼(Truman)>은 아닐까. 저 나무 위에 날아온 새의 이름이 혹 <트루먼(Truman)>은 아닐까. 저 담벼락, 아니 저 바람에 데굴데굴 구르는 것들이 <트루먼(Truman)>은 아닐까.


트루먼(Truman)! 너는 누구인가? 아니 무엇인가?

의문은 다시 정연해질 필요가 있어. 심각한 비약이나 비논리로 본질을 흐릴 경우가 빈번했거든. 하지만 그런 노력도 허사일 때가 많았지. 냉정한 이성만으로는 불가능한 게 너무 많다는 걸 이미 경험한 터이니 말이야. 당신이 거기 존재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나와는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살아온 이웃이나 친구라는 걸 알지만, 정작 당신(들)의 우정이 내 사랑……까지는 나를 데려다 줄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누가 나를 내 사랑……에게 데려다 줄 수 있을까.

내 사랑…… 망망대해……

돌이켜보면 나는 늘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건 아닐까 하고 회의하게 돼. 땅에 뿌리를 박지 못한 존재들의 떠돎. 그런 불안의 좌표처럼 어느 날에는 당신(들)의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지. 내가 내 이름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내 집과 친구와 이웃들과 그리고 마당의 잔디와 푸른 하늘까지…… 그렇다면 내가 겪은 파란고해, 희노애락애오욕도 가짜는 아니었을까. 아아아 그렇다면 내 사랑은? 과연 진실을 위한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믿어도 되는 걸까.

그러나 나를 얽어매고 있는 원인의 매듭은 다시 돌아온다. 그 매듭이 다시 나를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한 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에게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내 일찍이 고요한 하늘을 내 머리 위에 펼쳐놓고 내 자신의 날개로 내 자신의 하늘을 향해 날아보았더라면.
놀이를 하듯 그렇게 저 멀리 빛 속 깊이 헤엄쳐 가보았더라면, 그리고 나의 자유에 새의 지혜가 찾아들기라도 했더라면,
하지만 새의 지혜는 말한다. "보라,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몸을 던져보아라, 사방으로, 밖으로, 뒤로, 너 경쾌한 자여, 노래하라! 더 이상 말은 하지 말라!
말이란 것은 하나같이 둔중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경쾌한 자들에게는 말이란 것이 하나같이 거짓말에 불과하지 않는가? 노래하라! 더 이상 말은 하지 말고!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화는 나를 위로하려는 듯 수평선 끝에 <비상구>를 장치해 놓았지.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이 친구야. 세상은 자네가 겪은 것처럼 그렇게 위험한 것만은 아니야. 저 문을 통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갈 것인가. 늘 그랬듯이 결국은 선택이야. 자네의 삶이니까. 그건 영원히 바뀌지 않는 진실인 걸. 자, 이제 자네의 배역을 결단해야 할 때가 왔군. 우리는 자네를 사랑했어. 앞으로도 우리는 자네를 존중하고 믿을 거야. 왜냐하면, 자네는 우리의 <트루먼(Truman)>이니까.

감독 ; 피터 위어
출연 ; 짐 캐리

채어린 자유기고가








*본 내용은 지난 2021년 1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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