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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고백하지만, 나는 오늘도 하루를 살까, 아니면 살아버릴까, 하고 망설이곤 해. 그도 아니면 살지 말아 버릴까, 하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렇게 되곤 하는데, 늘 그렇듯 아침을 고민하고 한낮의 무료를 푸념하고 저녁의 적막을 걱정하면서 하루를 소비하지. 그리고 나는 셈해보는데 이건 남는 장사가 아닌 거야. 늘 그래왔으므로 아침마다 나는 하루를 결정하느라 침대를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 안락한 보료일수록 태양을 만나는 길이 멀기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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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깊은 숲속에서 사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했지. 아무런 규칙도 제약도 질서도 없는 곳 말이야.
이 영화의 그는 딸과 함께 깊은 숲 속에서 살지. 과연 어떨까. 되도록 복지국가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그는 인기척을 느끼면 더욱 깊은 숲으로 들어가 버리지. 깊은 숲―안식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단순할 거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흔적을 남기면 안 된다는 것. 발자국, 양말, 그림자, 형체조차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되지. 그건 발각이고 죽음과 같은 감금에 빠지게 된다는 걸 의미하지.
그렇다면 어떤 기억이 그의 삶을 숲 속으로 종용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영화는 이 의문에 대해서는 친절하지 않아. 다만 전쟁을 겪었으리라는 단초(端初)만 곳곳에 남겨 놓았지. 그렇지만 사회구조의 요구에 순응해야 하는 인간이 공동체를 저버리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분리를 완벽하게 실현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빤한데 말이야.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 숲을 나와야 하고, 생존을 위한 최소의 조건을 구하기 위해 문명사회에 잠시나마 편입해야 한다는 것도 빤한데 말이야.
그런데 숲 속의 권태는 과연 어떤 걸까. 혹은 음악과 기도는 그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어줄 수 없는 걸까.
당신이 사는 곳은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벽을 쳐올린 적소(適所)일 거야. 문을 열면 바로 편의점이 보일 것이고, 손에는 온갖 정보가 담긴 스마트폰을 가졌을 것이며, 신용카드는 두어 장쯤 지녔을 거야, 언제든 찾아갈 친구들은 즐비할 것이며, 가끔 영화관에도 전람회에도 혹은 하릴없이 나앉아 지낼 수 있는 카페도 골목마다 있겠지. 배고프면 붕어빵을 간식으로 먹을 수도 있지. 서정이 목마르면 음악에 귀를 맡기고, 이따금 떠오르는 추억으로 미소를 지을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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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흔적 없이 지나온 하루들…….
야생에서의 일상도 문명에서의 하루와 다를 게 없는 거 같아. 욕망의 선택이 무엇을 소비하는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면 말이야. 그가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애써 경계를 지을 필요는 없다는 듯 영화감독이 슬그머니 당신 곁에 끌어다 놓은 <그>라는 존재. 마치 당신의 삶은 옳은가, 라고 묻는 듯이 말이야.
산림관리원들에게 적발(?)되어 사회공동체로 강제 편입된 그는 불안해 보이지만 딸은 결국 그의 삶과 비켜나기 시작하지. 필요한 것, 누리고 싶은 것들이 다르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사회적 기술”을 위해 학교가 필요하다고 설득당하는 그를 위한 건 무엇이었을까. 집이 없는 건 범죄가 아니지만 국유지에서 사는 건 불법이라고 환기 당할 때, 평범한 집과 옷과 음식을 제공 당할 때, 마치 늪에 빠져버린 듯 허우적거리며 불가피한 선택 앞에 엉거주춤 멈춰버렸다고 느꼈을 때의 그는 당신의 이웃이 아니야. 다만 이방인인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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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그가 왜 사회부적응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어. 제공 당한 집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는 일종의 직업을 갖게 되고, 딸은 새로운 친구와 문화를 경험하지. 하지만 집 앞 잔디에서 잠을 자던 첫 밤은 적어도 복지국가의 시민의 모습은 아니었으니 그는 여전히 야생의 인간이길 바랐던 거지. 딸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치고 교회에도 나가지만 그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러나 딸은 숲을 망각해. 말 그대로 길들여지기 시작한 거야. 휴대폰의 필요를 말하고, 매일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과 어울리는 딸에게 그는 말하지.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집에서 살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일을 하는……”
고통을 극복할 수 없는 그는 결국 딸을 데리고 다시 숲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지. “왜 이러는 거야?” 딸은 불평을 터뜨리지만, 그의 의식을 사로잡은 건 “규칙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몰라.
이 영화가 어떻게 영화로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건 히피공동체와의 만남에서 볼 수 있는데, 숲 속에 사는 누군가를 위해 음식이 들어 있는 자루를 나무에 걸어두는 히피 여인. 그녀에게 숲 속의 누군가는 중요하지 않아. 그가 누구인지, 왜 거기 있는지 등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거지. 다만 그가 거기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만이 중요했던 거야. 영화감독이 그의 트라우마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는다는 것. 단지 그는 상처를 받았고, 지금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며 위로가 필요한 영혼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묻고 싶었던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
“봐, 겁낼 필요 없어.”
이 말은 딸이 맨손 위에 벌들을 올려놓은 채 그에게 한 말이야. 벌통의 온기를 느껴보라는 딸을 경이롭게 바라보는데, 그는 곧 떠나야 할 때를 예감하는 것 같았어.
"아빠에게 잘못된 게 나한테도 잘못된 것은 아냐."
어느 날 짐을 꾸리는 그에게 딸은 이렇게 말하지. 그러나 다름과 대립의 감정을 그에게 표현한 건 아니었어. 그 역시 딸에게 자신이 겪는 삶을 강요하지 않는데, 이는 영화 내내 “왜?”라고 묻지 않는 딸의 태도와 일관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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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절뚝거리며 그는 떠나지. 딸과 헤어지는 숲의 길. 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고 이내 사라진 <그>.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간다는 거야. 남들과 다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를 위해 딸은 휘파람 소리를 내지. 아니 새들처럼 지저귀는 것인지도 몰라. 숲의 언어는 문명의 언어와 극명해지고 히피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딸은 음식이 든 자루를 나무에 매달지. 저 숲 속의 누군가를 위해.
“이걸 열면 벌들이 나올 거야. 하지만 널 해치려는 게 아냐. 벌은 침을 쏘면 죽어. 그래서 널 쏘진 않아. 너한테 와서 몸에 앉아 널 알아보려고 할 거야. 이 상자 안에 있는 생명체들이 원하면 널 죽일 수도 있는데, 그런 벌을 신뢰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이란다. 그래서 벌의 신뢰를 얻는 건 나한테 많은 의미가 있는 거야…….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
마지막으로 벌을 치는 히피 여인의 말을 옮겼는데, 당신이 아래에 인용한 한 편의 시를 잘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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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경주 시, 「주저흔(躊躇痕)」에서
<채어린 : 자유기고가>
*본 내용은 지난 2020년 12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2025.12.08 (월) 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