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찰] “내일을 향해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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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찰] “내일을 향해 쏴라!”

행운의 과녁은 태양이다!

[GJ저널 망치]

가난한 자여, 걱정하지 마라.
은행은 길목마다 있지.
배고픈 자여, 걱정하지 마라.
빵집도 골목마다 있단다.
그러니 우울한 자여,
걱정하지 마라.
자랑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자는 없다.
그래도 아침에는 태양이 떠오르나니!

그리하여 당신은 선인장들이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선 황량한 사막을 매일 살아가는지도 몰라. 가시 돋은 선인장의 한 칸에 세 들어 사는 동안 창문에는 불을 밝히며 살겠지. 그렇듯이 당신의 산골짜기는 실화(實話)이지만 누군가 꾸며낸 동화(童話)였다면 아마 끔찍한 기분에 진저리를 칠까. 어느 기슭에서 벌어진 이상한 소문이 전설이 되거나 잊혀져도 상관없던 것처럼 말이야.

부치 캐시디(Butch Cassidy)와 선댄스 키드(Sundance Kid)가 살던 산골짜기에도 아침이면 태양이 떠오르곤 했지. 어둠이 내리고 모닥불을 피우는 이상한 저녁이 매일 반복되었지. 그들에게는 세 들어 살 만한 현대적인 선인장은 없었지만, 대신에 아주 푹신한 모래언덕이 신의 선물처럼 항상 예비되어 있었어. 돈이 가득한 은행은 마을마다 기다려주었고, 가슴을 뻥 뚫어주는 독한 술은 언제든 마실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리고 또 무엇이 필요할까. 아쉽지만 그들에게는 적금을 부어야 할 미래란 농담일 뿐이었어. 범죄의 나락으로부터 구원의 성경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지. 허리에 찬 권총은 지도이며 권력이며 등불이었지. 그러므로 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 건 (다행스럽게도) 가시가 사나운 선인장들끼리는 너무(?) 가깝지 않다는 것이었는지도 몰라. 마을과 마을은 가시의 거리만큼 멀었고, 그곳의 은행에는 어김없이 자본의 잉여가 가득 채워져 있었지.

― 우리도 은행 한 번 털어보자. 돈뭉치를 들고 튀는 거야.

이런 몽상은 이제 남루한 착각에 불과한 것이 됐지만, 여전히 우리의 희망찬 미래임은 부정하지 못할 거야.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가서 공포탄을 한 방 쏘는 짜릿한 기분을 상상해 봐. 그리고 로또가게를 나설 때의 야릇한 흥분까지도 말이야. 그래, 한방을 터뜨리는 거였어. 그곳의 온갖 희망들을 싹 쓸어 담아서 미리 준비해둔 지도를 따라 국경선을 넘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그리곤 불우에 대한 마지막 작별로 ’썩소‘를 은근히 날리는 것. 하지만 아직 샴페인을 터뜨려선 안 돼.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당신이 사는 세계의 그물은 지나치게 촘촘해서 바람조차 여권이 필요한 곳이라는 것.


’산골짜기 갱단(The Hole In The Wall Gang)‘으로 번역되는 원문을 직역하면 “벽에 뚫린 구멍 속의 건달”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한 가지 위안이 있는데, 바로 “에타”라는 여자야. 그녀는 부치와 선댄스가 가질 수 없는, 가진 적이 없는 박탈당한 삶의 공허를 채워주는 듯 보이지. 이는 곧 부치의 독백으로 드러나는데, “벽의 구멍을 보면 항상 처음처럼 기분이 새로워. 그때마다 항상 자문하지. 이런 삭막한 곳에 왜 다시 돌아오게 될까?”

그리곤 그들은 여전히 황야를 달리지. 은행과 기차를 강탈하는 건 너무나 쉬웠고, 도주로는 늘 그렇듯 황량한 사막이었어.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거나 숲을 거닐며 사과를 따 먹는 게으름을 한껏 피우고 싶겠지만, “구멍” 밖의 세계는 그리 녹록한 게 아니었어. 부치와 선댄스도 늘 그게 두려웠지. 과연 어디로 가야 안전할까. 새로운 삶에 대한 모색은 악명 높은 갱단의 무법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신기루에 불과했던 거야.

빗방울들이 내려요. 내 머리 위로 계속 쏟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아는 게 하나 있죠.
그들이 나한테 보내준 이 우울한 감정들.
하지만 날 어쩌진 못할 거라는 거,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을 거예요.
행복이 나에게 마중을 나오며 하는 말들이겠죠.
―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OST,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by, B.J Thomas)」 중에서

비가 내리면 태양은 보이지 않게 되지. 음울한 풍경 너머를 상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는 미래처럼 말이야. 하지만 비제이 토마스(B.J Thomas)의 경쾌한 목소리를 기억하면 좋겠어. 마치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를 말이야. 부치와 에타가 자전거를 타는 하루는 마치 영원의 시간을 하루에 다 살아버려도 좋을 것 같았으니, 금세라도 태양이 다시 열릴 것 같지 않아? 그런 상상이 오늘을 밝히는 힘이었는지 에타의 집에 머문 며칠은 황야에서 지친 그들에게 참으로 달콤한 휴식을 주지.

그러나 그들은 또 길을 떠나야 해. 곧 현금수송 기차를 강탈하는데, “구멍” 바깥의 태양은 아직 어두웠지. 매번 멋진 “한탕”일 수는 없는 거야. 무법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조직된 추격자들의 기습을 받은 부치와 선댄스는 결국 추격을 피해 미지의 세계로 내몰리지. 모래언덕을 지나고 바위산을 넘지만, 악마와 같은 추격의 그림자는 시시각각 그들의 목숨을 옥죄어오지.

이젠 목숨 걸고 싸우거나 손 들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을 거야.
항복하면 감옥행이고, 대항하면 포위해서 굶겨 죽일 거야.
아님, 총을 쏘든지, 바위로 깔아뭉개든지……. 또 뭐가 있을까.

영화는 빛바랜 사진이나 변색한 신문기사와도 같은 거친 스틸 컷으로 회고의 방식을 보여주는데,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가 실존인물이었고, 실화에 기초하고 있어서 과거를 현재로 다시 불러오는 효과를 보여주지. 이 문법은 굉장히 '영화적'인 것인데, 말 그대로 '무법천지 서부(Wild West)'의 낭만과 애상의 정서를 환기시켜 줌으로써 정서적 참여를 유발하는 장치였지.


마침내 낭떠러지를 향해 몸을 던지고서야 치밀하고도 소름 돋도록 무서운 추격을 따돌린 그들은 에타와 함께 국경을 넘지. 그곳이 신천지일 거라는 기대는 없지만, 또 “한탕” 벌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볼리비아(Bolivia)‘로 향하지. 그렇지만 그곳은 무법자들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두려운 미지의 땅이었어. 목가적인 풍경 앞에서 당황하는 그들의 모습은 오히려 농담 같았다고나 할까.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언쟁 다음의 부치는 이렇게 말하지. “은행 몇 개 털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은행은 어김없이 그들에게는 자유로웠고 사람들은 순진했어. 그들은 마음먹은 대로 드나들었고 탕진하면서 살 수 있는 미지의 땅이었지. 하지만 오히려 쾌활하고 유쾌한 강도 짓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이었어.

“정상적인 생활도 있어요.” 하고 에타는 말하지만, 그들은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고, 목장은 거칠고 힘든 곳이었지. 애초부터 부치와 선댄스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정착의 굴레였어. 일찍이 자본의 허상에 빠져버린 무법자들이었기에 평범한 일상은 차라리 비현실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었던 거야. 금광에 위장취업을 해보지만 그들의 본질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이었던 셈이랄까. 새로운 땅 볼리비아에서의 부치나 선댄스는 탈출이 아니라 우화(羽化)의 시간이길 바랐던 것 같았지만 말이야.

야만과 혼란의 서부시대에 어울리게 그들은 다시 본능적인 폭력의 세계로 돌아오지.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거였어. 은행은 언제나 그렇듯 탐스럽게 잘 익었고, 순진한 사람들의 마을은 아주 얌전하게 길들여져 있었지. 추격자들에 대한 불안이 시시때때로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었지만 새로운 기회는 늘 있는 거니까. 하지만 끝없이 내달릴 줄로만 알았던 무법자들은 모래바람이 아닌 총탄이 빗발치는 구석으로 폐쇄당하지. ‘산 비센테’의 특제요리를 먹지도 못하고 궁지로 몰린 그들은 더 이상 방랑할 수 없게 된 거야.

무법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역설과 농담 같은 건지도 몰라. 한없이 내달릴 수 있었던 황야를 잃고 회백색의 건물에 갇힌 그들은 야생의 본능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데, “다음 행선지를 결정했어.” 부치가 말하자, 선댄스는 “더 이상 기발한 생각”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말하지. 하지만 그들이 다시 미지의 땅을 떠올리는 건 아주 좋은 생각이었어. 그곳이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니고 “아프리카”나 “코리아”라고 해도 말이야.


그곳에서도 황량한 서부의 아침처럼 태양은 떠오를 테니까. 그곳에서도 멍청해 보이는 은행의 자물쇠는 쉽게 열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몇 가지 상상을 보태면 꽤 좋은 이웃을 만나고 포커판을 기웃거릴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갇힌” 공간을 뚫고 나가야 하지. 다시 방랑하려면 말을 타고 달려야 하지. 그건 현실의 질서를 벗어남으로써 야만의 무법적 자유를 구가하는 유일한 방법인데, 그들은 결국 스톱모션에 걸리고 말지.

갑작스러운 화면 정지로 시간은 고정되어버리고 영화는 끝나지. 엔딩 크레디트가 퇴락의 징후마저 덮어버리듯 스크린을 장식하는 동안 당신의 의식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건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인간에게 벌어졌던 특정 사건의 전말보다 당신을 더 슬프게 하거나 낯선 감흥을 주는 건 익숙해지기 위한 충돌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범죄의 향기와 이젠 죽어가는 낭만의 정취 따위를 떠올렸다면 당신은 아직 ‘건강한 나그네’일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일 거야.


하지만 오늘도 당신은 창문마다 불을 밝히고서 미망의 저편으로 이따금 눈을 돌리기도 했을 거야. 늘 그렇듯이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은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 거야. 부치와 선댄스가 황야를 도발하듯 살아온 다음 스톱모션에 걸린 것이 그러해야 했다면, 당신도 얼마간의 상실감과 양념 같은 비애와 생일선물 같은 향수(鄕愁)로 내일의 태양을 떠올릴 수 있겠지. 그러니 부치와 선댄스가 장렬한 최후로 무법의 경계에서 허물어버렸다 해도 당신은 박수를 칠 수는 없을 거야. 건물에 갇힌 채 평생을 다 보내는 동안 한 번도 울타리를 쳐부순 적이 없을 것이므로.


채어린 자유기고가


*본 내용은 지난 2020년 10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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