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찰] ‘포레스트’와 ‘검프’가 달려버린 불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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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찰] ‘포레스트’와 ‘검프’가 달려버린 불구의 세계

"인생이란, 한 상자의 초콜릿 같은 것, 뭐가 걸릴지 아무도 모르거든."

[GJ저널 망치] 나는 지금, 1994년에 만난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해. 그의 이름은 <포레스트 검프>. 포레스트(Forrest)는 ‘포레스트’라는 남북전쟁 영웅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했지. 포레스트 장군은 KKK단이라는 남북전쟁 후 극우 비밀 조직을 창립한 인물인데, 주로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과 반 유태인, 반 가톨릭 활동을 펼쳐서 미국 현대사에서 악랄함의 상징이 된 조직의 창립자로 알려졌지.

헌데, 왜 하필이면 ‘포레스트’였을까. 그리고 얼간이나 멍청이라는 뜻의 검프(Gump)는 또 무슨 뚱딴지인가 말이야.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것.
네가 무엇을 고를지 아무도 모른단다.

<포레스트>에게는 신보다 위대한 엄마가 있고, 아름다운 목소리와 천사처럼 예쁜 <제니>가 있지. 하지만 어린 <포레스트>는 불편한 다리 때문에 악동인 친구들에게 조롱을 받는데, 그런 탓에 그들을 피해 줄곧 도망쳐다녀야 했지. 소년은 곧 바람처럼 달릴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아이큐가 <75> 밖에 안 되기 때문에 특수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교장선생님은 엄마를 설득하지.

“남들이 너보다 잘난 척하게 하지 마라. 신이 사람을 똑같이 만드셨으면 모두에게 보조장치를 달게 하셨을 게다.”

달려, 포레스트!

악동들의 테러를 피해 달리게 된 <포레스트>도 자신의 경이로운 질주에 깜짝 놀랐을 거야. 교정기를 찬 채 걸어야 할 정도로 허약했던 <포레스트>가 다리의 보조장치들을 하나둘 떨쳐낼 때, 당신의 숨소리는 어땠을까. 그 순간 움찔거리는 몸을 느꼈다면, 당신도 이미 지구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던 건 아닐까. <포레스트>가 내뱉는 거친 숨을 당신도 함께 느끼고 온몸을 튕겨내며 발돋움하고 말았을까. <포레스트>가 그러했듯 당신도 신비한 해방감을 맛보았을까.

소년은 아주 당연한 방식으로 저항해버린 거라고나 할까. <포레스트>는 아주 잘 달리는 ‘훈련’으로 인해 미식축구 선수로 대학에 진학하지. 이쯤 되면 새삼스레 떠오르는 상투적인 상념이 있는데, 인생이란 게 참 묘한 거야. 그러니까 <포레스트>의 달리기는 운명이었던 거야. 불완전한 존재는 끊임없이 달려야 한다는 가련한 아이러니를 생각하고 말았지만 말이야.

나는 제니가 시킨 대로 뛰고 또 뛰었어요.
너무 빨리 뛰어서 혼자 남게 됐는데……

“왜 죽어가세요?”
“때가 된 것뿐이야. 절대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도 인생의 일부란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운명이지. 네 엄마가 된 것도 나도 모르는 운명이었어. 난 최선을 다했다.”
“엄만 훌륭하셨어요.”
“넌 네 운명을 잘 개척했어. 신이 주신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야 해.”
“제 운명은 뭐죠?”
“그건 네가 알아내야 해. 인생이란 한 상자의 초콜릿 같단다. 뭐가 걸릴지 아무도 모르거든.”

엄마는 말했지만, 초콜릿 상자에 아무 것도 담겨져 있지 않다면 당신은 어떤 마음이 될까. 신을 향해 혹은 엄마에게 버럭, 화를 낼까. 신이 주관하는 운명은 왜 공평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야. 영화는 영화니까, 그럼에도 <포레스트>는 초콜릿 같은 행운을 살아가지.

“위험할 땐 괜히 용감한 척하지 말고 뛰어.”

군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에 파견된 <포레스트>는 제니가 당부한 대로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달리고 또 달리지. “나는 제니가 시킨 대로 뛰고 또 뛰었어요.” 제니가 말한 대로 달리기 덕분에 전우를 구하는 공로를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전쟁영웅이 된 <포레스트>는 상관이었던 댄 중위와 함께 새우잡이 어선으로 큰돈을 벌게 되는데, 이런 행운은 일종의 미국식 마법이 아닐까. 게다가 애플사(포레스트는 과일 회사로 알지만)에 투자하여 더 큰돈을 벌게 되지. 이쯤 되면 <포레스트>는 <검프>이면서 완벽한 행운아임이 분명해.

여기에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도사리고 있는데, 반 전쟁 시위에 뜻하지 않게 휩쓸리게 된 <포레스트>는 대중 앞에서 전쟁에 대한 소감을 말할 기회를 얻게 되지. 하지만 그 순간 마이크는 꺼져버려. 그의 목소리가 제거당한 거야. 이 장면을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첨단의 무기로 무장했지만 세계질서의 재편에 실패한 전쟁. 한편, 탁구대회는 냉전 시대에 대한 화해의 시도였다면, <포레스트>의 이야기는 미국의 역사와 함께 역동하는 셈이지. 그의 이름에 저 악랄한 의 ‘포레스트’를 가져온 것처럼 말이야.

엘비스 프레슬리의 기타연주에 춤을 추는 어린 <포레스트>,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를 하지만 급히 화장실을 찾는 미식축구선수. <포레스트>.
닉슨 대통령에게 상처 난 엉덩이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슬쩍 까 보이는 전쟁영웅, <포레스트>.
스티브 잡스의 상징인 <애플>사의 사과마크.

또 영화의 주요 장면마다 나오는 음악은 어떤가.
1956년 발표, 빌보드 차트에서 11주간 1위를 차지했던 '하운드 독(Hound Dog)'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로큰롤의 황제'로 불리게 만든 대표곡이야.
존 바에즈가 부른 “바람에 실려서(Blowin' In The Wind)”는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저항의 아이콘이 된 밥 딜런의 음악이지.

그렇지만 청혼한 후 하룻밤을 함께 보낸 후 제니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리자 <포레스트>는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지.

“그날 난 아무런 이유 없이 뛰기로 결심했어요.”

왜 달려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듯 잭슨 브라운의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가 <포레스트>를 묘사하지. 길과 인생에 대한 음악은 <포레스트>와 <검프>가 비로소 당신과 나에게 아직은 잘 모르는 삶의 신비를 묻는 장면일까. 혹은 미국이라는 현대역사를 다시 반추하는 여정일까.

이처럼 역사적인 인물들을 기호로써 배치한 이유를 놓쳐서는 안 되는데, <포레스트>와 <검프>가 영화라는 구조 속에서 어떻게 서로를 추동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지.



3년 2개월 14일 16시간

고향으로 돌아온 <포레스트>는 여전히 제니를 그리워하지. 그에게 남은 유일한 행운이 아직 남은 거지. 그런데 앞서 말한 관점으로 말을 바꾸면, 미국은 과연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집이라는 거처는 불행한 인간에게는 유일한 행운일 수도 있겠지만, <미국>의 행운에는 아직 기다릴 무엇이 남았다는 거겠지. 바로 <제니>라는 표상인데, “사랑”이라고 평이하게 떠올린다면 우리는 <검프>일 뿐이겠지. 그렇다면 <포레스트>가 사랑한 제니는 왜 <제니>여야 할까.

미안하지만, 이 영화에서 제니는 그저 하나의 대상일 뿐이야. <포레스트>의 어머니가 그러하듯, 역사의 인물들이 또 그러하듯 주변인일 뿐이야. 이 점은 아쉽게 됐지만, 왜 <제니>일까, 라는 담론의 근거가 너무 빈약해서 아무 것도 상상할 수 없었어. 하지만 <제니>의 편린들을 조금이나마 살펴보자면, 그녀는 자신의 꿈인 가수가 되기 위해 대학까지 포기하고 히피 그룹에 섞여 떠돌아다니지. 그뿐인 <제니>의 삶이므로 <포레스트>를 반영할 만한 의미를 찾을 수는 없었어. 그럼에도 <포레스트>에게서 <제니>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존재야.

제니가 떠나버린 후의 3년 2개월 14일 16시간…… 그는 달렸지. 숫자의 마법에 걸릴 필요는 없지만, <포레스트>가 달리던 시간만큼 당신에게 특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사람들은 새로운 관심거리를 찾아내겠지. 새로운 농담과 음식과 춤…… 그리고 멋진 여행에 대해 의견을 나누겠지. 이처럼 멋진 인생은 다시없을 테니까 말이야. “큰 웃음과 고요한 진리가 깃든 풍부한 이야기”라는 비평가들의 언술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선택한 멋진 아이디어들은 마치 성지순례와 같은 거라고 자부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포레스트>의 초콜릿은 역시나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야. 연인들의 해후도 역시나 거대한 초콜릿 덩어리와 같은 것일까. 미국을 달리는 <포레스트>를 TV에서 본 제니는 마침내 <포레스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지. 그리고 우리는 신이 예비한 게 초콜릿뿐만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게 되지. 역시나 미국식 마법이야. 자신의 이름과 같은 “포레스트 주니어”를 만난 <포레스트>.

"너랑 같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죽음을 앞둔 제니와 침대 머리맡에서 마주한 <포레스트>의 담담하고도 초연한 얼굴을 나는 기억해.

“포레스트, 베트남에서 무서웠어?”
“그래. 글쎄 잘 모르겠어. 비가 그치고 별이 보일 때도 있었어. 그땐 정말 좋았어. 해가 지기 전의 바유도 멋있었어. 항상 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산 속의 호수가 너무도 깨끗해 꼭대기에서 마치 하늘이 두 개가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사막에서 태양이 뜰 때 천국이 끝나고 세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여. 너무도 아름다웠어.”
“나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걸.”
“함께 있었어.”

이제 나는, 오프닝과 엔딩에 나오는 하얀 깃털을 다시 떠올려. 오아시스(이창동 감독, 2002)와 함께 내게는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인데, 공주(문소리 분)는 거울햇살을 이용해 방안 가득 나비를 피워내지. 뇌성마비인 까닭에 속수무책인 공주의 몸으로는 그렇듯 기적이란 게 필요했던 거야. <바깥>이라는 미지의 초콜릿이 필요했던 공주는 어두컴컴한 방안에 갇힌 채 거울햇살로 나비 떼를 피워내는 게 행운을 부르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몰라.

그렇듯 <포레스트>의 하얀 깃털은 중요한 비유일텐데, 나는 애써 그 의미를 해석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바라보면서 느낄 수 있는 여분의 고요가 더 큰 기쁨일 테니까 말이야. <포레스트>가 살았던 시간 동안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한순간 침잠에 빠진다 해도, 제니의 묘비에 새겨진 “1945-1982”라는 생몰연대가 흐려진다 해도, <포레스트>가 제니에 무덤 앞에서 남긴 독백에 귀 기울이며 이제는 <포레스트 제니>와 작별해도 좋을 시간일 테니까 말이야.

“……제니, 난 잘 모르겠어. 엄마가 맞는지, 댄 중위님이 맞는지. 저마다 운명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바람 따라 떠다니는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 생각엔 둘 다 맞는 것 같아. 둘 다 동시에 일어나는 것 같아.”

이제 나는 <포레스트>를 숲[Forest]이라는 의미로 바꾸어야 할 시간이 됐다고 말하고 싶어. 악랄했던 KKK단의 상징이 아닌, 인간의 꿈과 본성이 발아할 수 있는 원형질의 그것으로 말이야. 그래야 우리들도 <포레스트>를 꿈꾸며 살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미국이 아닌, 당신의 삶에서의 행운과 같은 초콜릿을 신은 예비해두었을지도 모르니까. 한 번도 꺼내보지 못한 초콜릿 상자일지라도 엄마와 <제니>와 같은 행운을 가슴에 품고서 지구의 끝을 향해 달리는 꿈을 말이야.

나의 <포레스트> 들이여!

감독 : 로버트 저메키스
주연 : 톰 행크스(포레스트 검프), 로빈 라이트(제니)

<글쓴이: 채어린 자유기고가>











*본 내용은 지난 2020년 10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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