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동창 천재피아니스, 예술감독 |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개발도상의 인도네시아에 그 숭고한 5·18정신을 전하고 연대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음악과 무대로 형상화한 시상식은 시작부터 끝까지 천재피아니스트로 알려진 임동창 예술감독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임동창 감독을 만나기 위해 그의 거처이자 제자들을 기르는 전북 완주의 풍류교실로 찾아갔다. 2020년 광주인권상 시상식을 총감독하여 무대를 만들고 행사를 이끈 뒷이야기와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놀람과 감동, 울림으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 화순은 나의 외가, 어머니의 고향
화순 도암면 등광리가 외가이다. 어머니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나중에 외가는 나주 공산면으로 이사를 해 쌀농사를 많이 지었던 부자였다. 외할아버지는 정말 멋졌다. 유식하시기도 하고. 어렸을 적에 외할아버지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외할아버지께서 호탕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멋져 거울을 보고 흉내를 낼 정도였다.
어머니는 나주 공산 부잣집의 귀한 외동딸인 데도 가난한 ‘나주 임 씨’ 집안에 시집을 간 것이다. 나중에 왜 가난한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게 됐는지 물어보니, 외조부께서 사위 될 사람이 ‘나주 임 씨’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집안을 보고 혼인시킨 것이었다.
부모님은 결혼 후 군산에 정착하셨고 나도 군산에서 태어났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남들 밥 먹듯이 굶었다. 방학 때 외갓집에 가면 완전 유토피아였다. 한 번은 방학이 멀었는데도 외갓집이 너무 그리워, 어떻게 갈 줄도 모르는데 혼자 버스를 타고 나주로 가다가 못 가고 익산(당시 이리)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 할머니의 힘
외항선을 타셨던 조부께서는 거의 집에 안 계셨고 어쩌다 집에 돌아오셔도 늘 빈손이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게 할머니께서 군산 항구에 나가 조기나 갈치 등을 엮는 일을 하셨다. 상처난 생선들은 상품이 안 된다고 버렸는데 할머니께서 그것을 모았다가 집으로 가져와 끓여 먹었다. 생선의 머리에 있는 딱딱한 이석만 남기고 생선의 눈알까지 다 씹어먹었다. 밥을 밥 먹듯이 굶으며 자랐어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할머니의 힘인 것 같다. 지금도 내 골밀도는 20대이다. 신선도 높은 생선으로 고단백, 고칼슘을 취했으니 건강할 수밖에, 우리 할머니의 힘이 대단한 것이다.
▲ 신 내리듯 피아노 소리가 내 몸으로 들어와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봤다. 아주 오래된, 곧 썩을 것 같은 영국제 피아노였다. 개학한 첫 주, 첫 음악시간에 선생님께서 그날 가르칠 노래를 피아노로 한 번 쳐보겠다고 하시며 피아노를 뚜벅뚜벅 치셨다. 선생님이 피아노를 치거나 말거나 오랜만에 만난 육칠십 명이나 되는 머시매들은 막 떠들어댔다.
나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친구들과 막 떠들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내 몸 속으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치 무당 신 내리듯이, 그 피아노 소리가 내 몸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감전된 것처럼...
그날 학교 끝나고 음악 선생님께 ‘음악실 열쇠 좀 주세요’ 했더니 주시더라. 음악시간에 들었던 것을 기억해 내서 피아노를 쳤다. 재미가 있었다. 다음 날도 또 열쇠를 달라고 해서 쳤다. 선생님이 쳐 주던 것을 완벽하게 쳤다. 선생님보다 더 잘 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심심해졌다. 두 배 빠른 템포로 피아노를 치니까 재미가 있었다.
3일째 선생님께 열쇠를 또 달라고 하니까 선생님께서 피아노를 치려면 정식으로 치라고 하셨다. 정식으로 치는 게 뭐냐고 물으니 바이올린(바이엘) 책을 사다 치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헌책방에 갔다. 책방 아저씨에게 바이올린 책 좀 달라고 하니까, 뭐? 바이올린 책이면 스즈끼 1권, 2권 그런 것인데, 몇 권? ‘바이엘’이라는 걸 들어본 적은 없고 바이올린은 들어봤으니 그렇게 들은 것이다. 피아노 치려고요 했더니, 그럼 임마, 바이올린이 아니고 바이엘이야.
그렇게 뒤표지가 떨어져 나간 빨간 표지의 바이엘 한 권을 사 가지고 와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음악실에 내 이부자리를 갖다 놓고 살면서 혼자서 1년 동안 피아노를 쳤다.
▲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이 첫 연주가 되다
1년 뒤 3월 15일에 우리 학교 학예발표회가 있었는데 그 많은 애들 중에 피아노 치는 애들이 없었다. 음악 선생님 중 한 분이 나에게 피아노 독주를 하라고 하더라. 영광으로 생각하고 하겠다고 했다. 선생님 댁에 갔는데 악보도 아무것도 없이 그냥 음반 하나 틀어서 들려주고는 이 곡을 연습해서 치라고 했다. 그 곡이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이었다.
알았다고 말씀드리고 선생님의 악보를 빌려 와 그것을 직접 내 손으로 다 그렸다. 그렇게 공부했다. 들은 게 있어서 들은 대로 치려고 엄청난 연습을 했지만 제대로 안 됐다. 빠른 속도에 맞추면 소리가 작고, 소리를 키우면 속도가 안 나고... ‘아, 이래서 배우는구나’ 하고 배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날 학예발표는 소새끼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들어가 첫 연주를 했다. 어떻게 연주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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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노 레슨비 3천원이 전부
곧바로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하다가 군산에서 제일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무작정 갔다. 어느 집에서 아이들이 제일 많이 나오나 살폈다. 그때는 피아노 학원이 없었다. 다 개인교습이었다. 어느 한 집에서 피아노책을 든 학생들이 제일 많이 나왔다.
그 집에 들어갔더니 남자 한 분이(이길환 선생님)이 딱 앉아 계셨다. 선생님을 보자 기분이 엄청 좋았다. 한 번 쳐 봐라 해서 쳤더니, 와서 배우라고 하셨다. 그때 레슨비가 3천원이었다. 80kg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우리 아버지 월급이 쌀 한 가마니가 안 됐으니까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어떻게 구했는지 3천원을 마련해 주시더라. 그래서 선불로 3천원을 가져다 드렸다. 선생님께서 그 레슨비를 받으시고는 다음부터는 레슨비를 가져오지 마라고 하셨다. 짐작건대 내 행색이 너무 가난해 보이니까 그러신 것 같다.
내가 피아노를 치면서 들어간 돈은 그때 딱 한 번 3천원이 전부다.
▲ 교회 피아노 폐달에 빵구가 나다
내 피아노도 없이, 레슨비도 없이 피아노를 치려면 학교 음악실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사립학교라 그럴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학교에서 못 치게 하니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부터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때 우리 선생님이 교회(군산 세광교회) 성가대 반주를 하셨는데 나한테 반주하라고 넘겨주셨다. 그래서 교회로 짐 싸 들고 들어갔다. 단층 슬라브 교회였는데 창고 위에 조그만 다락이 있어서 그곳에서 자고 얻어먹고, 어느 때는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루 16시간 이상씩 연습을 했다. 목사님의 새벽기도가 끝나면 창고에서 내려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나중에 피아노 폐달에 빵구가 나버렸다.
![]() 소금 전등 |
▲ 피아노를 제물로 바치며 깨달은 삶의 통찰
그렇게 남의 피아노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교회가 없었으면 피아노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중으로 출가도 하고 별짓 다했지만 예수, 부처, 공자, 노자가 같이 있다면 예수를 따라간다고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예수는 내가 가난한 시절, 교회에서 만난 최고의 스승이었다. 성가대 반주를 해야 하니까 늘 목사님 설교를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 중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 마음에 딱 맞았다. ‘저 들에 핀 꽃을 봐라. 먹고 입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이 먹여 주고 입혀 주는데 하물며 사람을 내버려두겠느냐.’라는 내용이었다. 너무너무 기뻤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지만 ‘내가 지금 옳구나. 내가 지금 잘 살고 있구나.’라는 확신을 2천 년 전의 예수께서 준 것이다.
피아노를 제물로 바치며 현실이라고 하는 삶을 직시했고 눈에 보여지는 것들에 대한 통찰을 하게 됐다.
<다음 호에 계속>
*본 기사는 지난 2020년 11월 취재한 기사임을 알려드립니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2025.12.11 (목) 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