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열 열사가 1966년에 태어났던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의 한 농가(현재 모습) |
배은심 여사의 생전 인터뷰 내용 중, ‘화순에서 살 때가 진짜 행복했고 걱정도 없었다’고 전한 말이 있다.
1960년대 초, 농협은행 직원이었던 이한열 열사의 부친은 화순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희망에 의해 가족들을 이끌고 화순으로 들어온다. 능주면 남정리의 한 농가를 얻어 세들어 살면서 이한열 열사를 1966년 8월 29일 낳는다.
이한열 열사를 낳기 전 배은심 여사가 꾼 태몽이 특별하다. 집 마당에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에서 무지개가 서고 그 무지개의 그네를 타고 아이가 내려오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이한열 열사가 연세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있었다. 이한열 열사도 결의대회에 참석 후 천여 명의 학생들과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진압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이한열 열사는 의식을 잃었다.
이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시민들의 분노는 커졌다.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100만 명이 넘는 시민과 학생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시위가 지속적으로 확산되면서 전두환 군사정권은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머리가 크게 손상된 이한열 열사는 27일간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고 그해 7월 5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화순이 낳은 이한열 열사는 학생운동가로서, 전두환 독재타도와 5·18진상규명 등을 외쳤고 그의 목숨값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앞당겨졌다.
그리고 35년간 아들을 가슴에 묻은 채, 아들이 못다 이룬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배은심 여사도 이제 아들 곁으로 떠났다.
다행히도 배은심 여사의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 이재명 대선 후보 심지어 야권 대선 후보 윤석열 씨까지 장례식장을 찾아 애도를 표했으니...
![]() 표지석이 너무 작은 데다 골목에 놓여진 녹슨 철판 컨테이너 구조물 한 쪽에 바짝 붙여 세워진 표지석 |
그러나 화순의 이한열 열사는 아직 외롭다. 이한열 열사의 생가터가 화순에 있다는 사실을 화순 사람들도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생가터가 화순 능주에 있다는 정보가 있어 찾아가려고 해도 쉽지가 않다. 네비게이션을 이용해 찾아갔는 데도 표지석이 골목 한 귀퉁이에 그것도 녹슨 컨테이너 구조물 벽에 바짝 붙어 세워져 있으니 육안으로도 찾을 수가 없었다.
87년 6월 항쟁에 불을 질러 사실상 군사정권의 항복 선언인 6·29선언을 이끌어낸 고인 이한열 열사에 대한 예우로는 너무 빈약하다 못해 민망하다.
화순의 역사를, 대한민국의 역사를 고귀하게 만든 인물을 이렇게 대우해서야 되겠는가?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6월 민주항쟁은 이한열 열사가 능주면 남정리에서 태어난 1966년 8월부터 시작됐다.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화순군이 되길 바란다. 화순군의 위상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
의향 화순의 맥을 이어준 이한열 열사의 생가터를 민주화 성지로 조성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인들의 발길이 닿도록 화순 군민 모두가 희망하길 바란다.
*본 기사는 지난 2022년 1월 취재한 기사임을 알려드립니다.
![]() 이한열 열사의 생가터임을 안내하는 작은 표지석 |
김지유 GJ저널망치 대표 gjm2005@daum.net
2025.12.08 (월) 1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