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법정에 80여 차례 선 이금주, 패소를 넘어 역사가 되다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운동의 산증인 이금주 선생 추모 공연 성료 김지유 기자 gjm2005@daum.net |
| 2026년 07월 05일(일) 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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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는 정신영 할머니(나고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서태석·한문수·김태길·이민관·조태규·이유식 유족 대표, 민형배 광주·전남 통합특별시장, 정진욱 국회의원, 박균택 국회의원, 강정채 전 전남대학교 총장, 장휘국 전 광주시교육감, 김선호 전 광주시교육의원,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역위원장, 갑제 한말호남의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정길 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조오섭 전 국회의장 비서실장, 최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고문, 임선숙 변호사 등이 참석했다.
▲ 남편 잃은 슬픔 넘어, 유족운동의 길을 열다
이금주 선생은 1920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40년 김도민 씨와 결혼했으나 1942년 남편은 일본 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됐다. 당시 아들은 생후 8개월이었다. 곧 돌아오겠다던 남편은 1943년 남태평양 타라와섬 전투에서 전사했다.
광주에 정착한 이금주 선생은 같은 피해자와 유족들을 찾아 나섰다. 해남·완도·영암 등지를 직접 돌며 피해 사실을 수집했고,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를 결성해 조직적인 권리회복 운동에 나섰다. 한때 전국 47개 지부와 1천여 명의 회원을 둔 유족운동의 중심 조직으로 성장했다.
▲ 일본 법정 80여 차례 “질 것을 알면서도 싸우고 또 싸웠다”
1992년 원고 1,273명이 참여한 이른바 ‘광주천인소송’을 시작으로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을 상대로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일본군 위안부·근로정신대 소송, 강제동원 피해 소송 등 7건의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일본 법정을 80차례 이상 오갔지만 대부분 패소했다. 그러나 이금주 선생은 멈추지 않았다.
이어 “일본 재판에서는 졌지만 역사에서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며 “오늘 이 자리가 그 결과이자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 떠안았다”
▲ “어디에도 없는 나라” 국가가 외면한 피해자들의 역사
이어 “그를 감싸줄 나라가 어디에도 없었다”며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를 언급한 뒤 “그가 남긴 기록은 보존과 연구, 교육 가치가 매우 높은 역사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강 전 총장은 이금주 기록물 보존시설과 연구·전시 공간 마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 “주인공은 이금주가 아니라 기록이었다”
행사를 진행한 광주MBC 홍진선 PD는 이금주 선생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느낀 소회를 밝혔다.
실제로 이금주 선생은 평생 일기를 썼고, 유족회 회의록과 회계장부, 영수증, 피해자 증언, 탄원서, 소송자료 등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전시에서는 ‘이금주 유서’, ‘광주천인소송 원고단 서명부’, 일기장과 영수증, 각종 회의록 등이 공개돼 참석자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 기록을 남긴 사람, 역사가 되다
일제가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 청년과 청소년을 전쟁터와 군수공장으로 강제동원했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금주 선생은 그 비극을 몸으로 겪은 세대였다. 그러나 그는 피해자로만 남지 않았다. 유족회를 만들고 피해자들을 조직했으며, 자료를 모으고 기록을 남겼다. 일본 법정을 오가며 진실을 밝히려 했고, 끝없는 패소 속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금주 선생이 남긴 일기와 회의록, 영수증과 소송자료는 오늘날 강제동원 역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사료가 됐다.
이날 행사는 이금주 선생의 삶을 추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남긴 기록을 어떻게 보존하고 계승할 것인가를 묻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을 상대로 수십 년간 법정투쟁을 이어온 이금주 선생의 활동을 재조명하며,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강제동원 시민역사관 건립, 상설 연구·전시 공간 조성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김지유 기자 gjm2005@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