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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찰]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도그빌Dogville, 감독: 라스 폰 트리에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2025년 12월 05일(금) 16:53
영화, 도그빌Dogville 포스터
[GJ저널 망치] 나는 오래 전에 집을 떠나왔다고 당신에게 말했었지. 새로운 마을에 정착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옛집을 그리워하는지 당신은 기억할 거야. 옛집이 있던 마을 앞에는 강물이 흐르는데, 둑길에 피고 지던 꽃들이나 앞산으로 저물던 저녁풍경과 재두루미가 날던 먼 여울에 대해서도 나는 자주 말했던 거 같아. 하지만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도 말했던가. 흑백으로 퇴락해버린 기억은 시간마저도 무감각해져서 실제로 내가 살았던 기억들을 의문하게 되는 사태(?)까지 일어나곤 했으니까 말이야.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고 멋진 추억의 <그곳>을 이렇게 말하는 건 분명 불행한 일이지만……!

연극무대처럼 꾸며놓은 낯설면서 낯설지 않은 마을이 있어. 건물들과 도로들은 정연하고, 나무가 자라고 웅숭깊은 바위도 있지만 모형일 뿐인 마을. 기호와 문양과 문자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은 영화의 배경을 위한 초대형 세트인데, 당신은 보았겠지. 아니 느끼고 말았겠지. 감촉하는 실체의 무게와 질감, 그리고 냄새로 경험된 안정감은 얼마나 일상적이었던가. 그렇지만 실체적 진실은 과연 당신의 경험을 얼마만큼 확증해줄 수 있을까.

그래선지 영화 <도그빌>은 현실과 비현실의 간극에서의 모험인 듯 보였어. 모형으로 이루어졌지만 왜 모형만은 아닌 것일까. 구획된 위치에 놓인 <이름>들을 향해 인물들이 행동하자 감쪽같은 마법이 일어나는데, 암시와 비유만으로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거지. 구름이 흩어지고 달빛이 비치는 꿈같은 상상만으로도 파이가 만들어지고 책임감이 되고 인생이 되는 마을. 손가락을 가리키면 나무가 푸르고, 하늘은 높고, 허공을 두드리면 노크소리가 나고, 찻잔을 따르면 금세 뜨거운 온기가 만져질 듯 신비로 가득한 마을. 하지만 사람은, 아니 도저한 인생만은 모형으로 대체할 수 없는 마을……!


당신의 <그곳>은 어떤 마을일까. 언젠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는데, 당신은 슬며시 입꼬리를 추어올리는 미소로 대꾸했었지. 그리고 먼 눈으로는 아마 오래된 영상들을 떠올렸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그곳>은 뼈에 각인될 만큼 또렷한 기억의 세계이니까 말이야.

내가 나고 자랐던 <그곳>을 떠올리면 먼저 흙먼지가 날리는 신작로가 떠올라지는데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던 우마차가 나타나지. 들판을 달려온 우마는 된숨을 씩씩거리며 길바닥에 커다란 똥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지났지. 우마차가 사라지던 골목의 길모퉁이 저 너머로는 까불며 놀던 아이들을 숙연케 하는 놀이 붉게 번지고, 어디론가 사라져가던 사람들의 실루엣은 도깨비불빛처럼 깜박거리기도 했어. 허공에는 제비들이 낮게 날았고 전선들은 쉴 새 없이 지지거렸지. 그리고 저녁밥을 안친 엄마들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거지……!

안타깝지만 <그곳>은 동화의 세계가 아니야. 평온한 밤이 지나면 다시 악다구니가 울려 퍼지고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지워지는 생활은 다시 어둠으로부터 평온함을 얻곤 하지. 록키산맥에 자리한 작은 마을 <도그빌>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런 어느 날 이 평온한 마을에 총소리가 울리고, 한 여자가 마을로 숨어 들어오지. 몹시 불안해 보이는 여자의 이름은 ‘그레이스’. 그녀를 처음 발견한 ‘톰’은 ‘그레이스’를 마을 사람들에게 인도하고, 갑작스런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 머물 수 있는 2주일의 시간을 허락하지.

하지만 틈입자는 모형으로는 불가능한 생활에 파문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제껏 완벽한 마을의 질서와 전통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아왔던 <도그빌>의 사람들은 ‘그레이스’로 인해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하루하루를 살게 되지. 그녀는 누구인가. 어디서 온 걸까. 착한 사람일까, 아니면 범죄자일지도 몰라……!

나는 이따금, 불현듯 기억되는 사람들을 생각하곤 해. 어느 순간 삼삼히 떠오르는 사람들은 옛집이 있던 마을 밖의 굴다리를 배경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기억은 촘촘하지 못해서 어떻게 그들이 내 기억으로 스며든 것인지 모르겠어. 분명한 것은 오랫동안 마을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아니라는 거야. 이를 테면 누구네 아버지나 삼촌 혹은 ‘누구네’와 연결된 사람이라면 ‘누구’로부터 실마리를 얻어 기억을 회복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래선지 그들은 희미한 스냅사진처럼 이미지만 남아 있어. 예를 들면 군용신발을 신고서 신작로의 돌멩이를 걷어차던 사람이라든지, 침을 찍찍 내뱉으며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던 사람이라든지, 꼭두새벽마다 바쁜 걸음으로 굴다리를 빠져나가던 검푸른 뒷모습이라든지, 막걸리를 마시곤 술잔을 큰소리로 내려놓는 사람이든지……!


경험하지 못한 불가사의한 필요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도 한다는 걸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어. 당신이 살고 있는 마을도 예의 그럴 거라고 짐작되는데, 질서가 강화될수록 도덕과 윤리라는 장치 또한 예민한 법이지. 구성원들은 타인에게는 예의를 갖추고 대하며 자신의 일에는 열심이어야 하지. 휴식이 필요하면 친구를 만나고,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되도록 안정된 규칙이 위협받지 않기를 바라는 거지. 그렇게 서로의 규율을 엄수하며 사는 마을. 그러므로 ‘그레이스’라는 이방인은 불안한 위험신호와 같은 존재인 셈이야. 사람들은 선량한 온정을 베풀고 새로운 이웃의 안녕을 바라지만 결국 폭력으로부터 도피해온 여자라는 걸 확인한 후부터 사람들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진다는 거야. 불길함은 곧 마을의 도덕과 질서가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돌변한 사람들의 적대성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변질되고 겉보기에는 평온하지만 태도는 수정된 욕망을 폭력으로 개발하는 거지……!

나는 또 어떤 한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어. ‘도춘’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왜소한 몸집에 다리 하나를 절름거리던 사내였지. 그의 집은 굴다리 밑에 판자 따위로 바람막이를 한 구석이었는데, 아무도 그를 방문하는 일은 없었지. 간혹 마을사람들의 허드렛일을 거들어주며 밥을 얻거나 막걸리를 헐레벌떡 들이키던 그를 떠올린 것은 헝겊조각 같은 주검 때문이야. 그가 죽던 날은 장날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 가물거리는데, 이상하리만치 슬프면서도 기이한 풍경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어. 그리곤 아무도 ‘도춘’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 그가 문득 사라졌다는 걸 떠올린 건 그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훌쩍 비켜나버린 뒤였어. 그렇구나, 그랬었지. ‘도춘’이를 호명했지만 대꾸는 너무나도 싱겁기만 했어. 나는 쓸데없는 기억을 가진 걸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선악의 문제는 여전히 모호한 물음이지만 나는 다시금 생각하게 돼. 죄와 심판, 혹은 신(神)이나 악마와 같은 언어들을 떠올리고 있어. 그리고 <도그빌>의 사람들과 ‘그레이스’는 또 어떤가. 이 영화의 물음은 마지막 시퀀스에 집약되는데, ‘그레이스’와 그 아버지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지.

그들은 권력을 올바로 썼어야 했어.
다른 마을을 위해, 인간성을 위해……

‘그레이스’를 강간하고, 강제노역을 시키고, 증오하고, 심지어는 살해하려 했던 그들은 소박했고, 선했고, 근면했던 산골 마을의 사람들이었지. 그들의 구성원인 개(모세)를 죽여 효수함으로써 응징하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회의적인 얼굴로 ‘그레이스’는 말하지. 그렇다고 마을이 달라지지는 않아요……. 결국 ‘그레이스’는 선택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사살시키고 마을은 불살라버리지. 심지어는 엄마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아이들을 죽이는 잔혹함을 보여주는 ‘그레이스’는 처연한 얼굴로 도덕과 질서를 위한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 말하지.

그리고 남은 한 사람. 당신이라면, 젊은 철학자이자 작가인 ‘톰’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하지만, 그는 ‘그레이스’라는 인간의 존엄을 외면한 본질적인 악마의 전형일지도 몰라. 그들의 최선이 과연 훌륭할까, 라는 아버지의 물음은 인간의 ‘본능’을 관통하고, ‘그레이스’는 본능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대꾸하지. 하지만 ‘톰’은 지식과 도덕의 허위로 권력(권위)을 얻고, 또 기만적인 인간성의 표본이 되어 최후의 심판의 대상이 되지. 사람들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그가 말할 때의 허위와 기만과 오만의 섬뜩함에 내가 전율할 때처럼……!

감독: 라스 폰 트리에

<도그빌>은 미국과 정착민을 상징한다고 해, 그리고 ‘그레이스’는 이민자를 뜻한다는데, <도그빌>이라는 도덕적 질서를 가진 세계에 ‘그레이스’라는 메시지의 틈입으로 본 정착민들의 오만과 도덕적 자기기만, 선과 용서에 대한 폭력의 정당성 들이 이 영화가 찾는 진실인 셈이지. 나는 그렇게 이해했거든. 이기적인 동물이 사회를 지배하고, 권력을 위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정치는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은가. ‘그레이스’도 결국 본능에 대한 처단을 실행했듯이 파괴본능은 새로운 건설을 추동한다고 믿는 걸까.

이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미국 3부작 중 첫 영화에 해당한다는데, 보다 면밀한 쇼트에서 <인간>을 구축하는 본질적인 모순에 나는 시선이 더 자주 머물 수밖에 없었어. 연극적 요소를 극대화한 세트라든가, 챕터 분할을 통한 전개는 관객으로 하여금 객관화를 유도한 구성으로 보였어. 내레이션은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거리감과 몰입을 분할하는 효과를 만들었고, <도그빌> 마을의 평면도를 노출하거나 팬터마임은 영화와 관객의 위치를 환기시켜주는 문법인 거지. 이때의 감정들은 낯선 자아를 통과하게 되는데, 현실(정착민)과 비현실(이민자)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미국>이라는 기호를 만들어내는 거지……!


이제 아주 오래된 슬픔 하나를 당신에게 고백해야겠어. 어느 계절이었는지, 한낮이었는지, 애저녁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아. 하지만 너무나도 또렷하게도 손바닥에 남은 충돌감각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분명하다는 거야.

턱!

지붕과 전선들 사이로 곡예를 하듯 제비들이 비행하는 모습은 늘 경이롭고 장쾌한 기분을 자아내곤 했지. 나는 저토록 신비로운 날개를 선망하면서 바라보곤 했는데, 그래서 제비들을 따라 두 팔을 벌려 활공하듯 신작로를 달리곤 했는데, 그날은 심술이 났었나 봐. 대문에 세워져 있던 빗자루를 들어 허공을 향해 휘둘렀지. 질투 나는 날갯짓을 훼방이라고 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때 둔탁한 비명이 들렸어. 턱……! 그건 바람의 거친 목소리였어.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나를 부르던 목소리였을까. 그렇지만 손바닥에 전해지는 불길한 감각에 나는 소스라쳤고 지붕 너머와 전선들 사이를 활공하는 제비들을 바라보았지. 하지만 내 앞에 떨어진 있던 까만 주검……!

용서받아야 한다면 누구에게 받아야 할까. ‘그레이스’는 <모세>라는 이름의 개를 남겨놓고 떠나지만 아직 당신과 나는 그곳에 남아 잿더미 속 어딘가에 뭉뚱그려진 갈등에 전전긍긍하며 박수를 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도그빌>은 이제 더 이상 마을이 아닌 <바깥>이 되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 선과 악, 용서도 처벌도 오만도 없는 산기슭에 달빛만 여여하겠지.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 죽은 제비의 주검을 황급히 전봇대 아래에 묻고는 시침을 뗀 채 살아버린 세월 동안 나는 제비를 잊었고, 완벽하게 기억하지 않았고, 살아가면서 인생을 기만한 대가를 소망하며, 나약한 척 살아가는 나는……!


자유기고가: 채어린


*본 내용은 지난 2021년 11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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