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해찰] 광기와 혼돈의 역사,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 전쟁 로드무비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GJ저널망치 gjm2005@daum.net |
| 2025년 12월 02일(화) 1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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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나는 그런 나라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살고 있을 그곳. 또 다른 박정희와 전두환들이 잔혹한 살상을 서슴지 않는 그곳. 과연 미얀마는 인류의 역사가 폭력으로 점철된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줄 것이던가.
나는 지금 당신에게 말하기를, 전쟁과 잔혹성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오늘도 내가 건넜고 어제 그러하듯 내일도 마주하게 될 면면한 강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과연 강물 속의 광기마저 외면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니…….
새삼스럽지만 나는 전쟁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의 파렴치를 너무나도 많이, 다양하게 경험해버린 터이기 때문이다. 이미 참혹한 목격자였으며 비켜선 비겁자였다고 고백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것.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핏방울 튀기는 장면은 차라리 면도날로 예각된 순간처럼 적막해지기까지 한다. 총을 든 훈련된 군인들이 진격하는 도시를 보라. 저항할 수도 없이 총칼에 몽둥이에 노출된 무방비의 시민들을 보라. 그리고 긴급히 타전되는,
SNS의 메시지…… "내가 카인이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 항의 시위의 첫 희생자인 먀 뚜웨 뚜웨 카인. 20살 여성이었다. 그는 2021년 2월 19일 머리에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는데, 그 죽음을 알리는 "내가 카인이다"라는 봉기의 메시지가 SNS에 이어지며 미얀마의 불복종 운동과 저항의 상징이 된 이름이다.
그 후…… 80년 광주가 미얀마로 향하는 순간, 나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새삼스럽게도) 다시금 의문하게 된다. 과연 인간과 짐승을 구별할 수 있다면 무엇으로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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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이 터지고, 헬기, 전투기가 하늘을 지배하고, 인물들은 미쳐간다. 무엇을 위해 총을 들었는지 모르는 저 처연한 얼굴들. 무엇을 위해 봉기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미얀마의 시민들, 그 오버랩의 순간, 나는 봄꽃들이 핀 들판을 떠올리고 만다. 광주 금남로의 플라타너스에도 신록이 번져가는 걸 본다. 사람들의 화사한 의상들을 본다. 이제는 새롭게 단장한 <전일빌딩>과 <아시아문화전당>으로 탈바꿈된 “광장”이었던 분수대를 본다. 피 끓던 함성이 울려 퍼지던 5월의 하늘을 본다. 거기에 미얀마가 있으니…….
강물은 흐른다. 사람들을 위무하듯 면면히 흘러 바다에 닿겠지만, 그리하여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 소리로 돌아와 노래가 되고 춤이 되고 시가 되고 다시 생명을 불어넣겠지만, 인간은 폭력으로써 노래하고 춤을 추고 시를 쓰고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것인가. 병사들은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도 향수병에 시달린다. 전우는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잔인한 살상의 기억은 고향의 기억을 소환하지만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 순간 군장을 꾸리고 진격해야 한다. 전진해야 하는 군홧발은 표적이 없고 불가사의한 여행은 꿈의 바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을 향한 행군에는 최종 목적지가 있다. 그곳…….
미얀마는 오늘도 악몽 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곳을 여전히 모르지만, 뉴스 화면으로 본다. 겁에 질린 시민들, 분노에 치를 떠는 시민들, 간절히 호소하는 시민들……. 그리고 광포한 진군의 총부리들이 있다. 앵커의 목소리를 삭제한다면 나는 아마 허공을 목격할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언어가 사라지고 인간이 짓는 몸짓만 남은 활동사진뿐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뒤쫓고 있다. 어느 순간 인간 하나가 사라지고 <절규>가 들리지 않는 인간 몇몇을 보게 될 것이다. 거리는 황폐해지고 “삶”이었다고 할 만한 생활도구나 간판이나 자동차들이나 가로수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지옥의 묵시록’이었다.
나는 당장 마음이 우울해졌다. 영화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영화는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요구하고, 그 시간들은 기나긴 고문이었다.
미군 공수부대에 소속된 윌러드 대위는 커츠 대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철저한 기밀 속 금지구역인 캄보디아를 향해 험난한 여정을 떠난 그는 죽고 죽이는 전쟁에 점차 피폐해져 간다. 윌러드 대위는 임무에 따라 눈과 귀를 닫아야 할 야만적인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횡단한다. 회의를 느끼지만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는 캄보디아로 흐르는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메콩강의 하구는 광대한 삼각주, 침입할 수 있는 지점은 두 곳이다. 윌러드 일행은 행선지의 한 마을을 초토화시켜야 한다. 영화는 전쟁의 광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게다가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을 확성기로 크게 틀고서는 마을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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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러드 일행은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초계정의 급유 때문에 들른 육군 기지는 떠들썩하다. 부대가 소란스러운 것은 플레이 걸들의 위문 공연 때문이다. 이윽고 기병대와 인디언, 카우보이 복장의 플레이 걸들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고, 고혹적인 퍼포먼스에 부대원들은 열광한다.
다시 강을 따라 올라가던 윌러드 일행은 수상한 배를 만나지만 잠복해있던 월맹군의 총격을 받는다. 한 소녀가 머물던 배에서 윌러드는 깡통 속의 강아지를 발견한다. 소녀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는 강아지를 향해 권총을 꺼낸다…….
5월 광주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시민들은 평등과 자유에 대해 다시 묻는다. 계급 간 불화를 엄연한 현실로 순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자괴가 관성을 얻는 눈치다. 광주천의 버들에도 슬쩍 연둣빛이 어린다. 이따금 버드나무 가지를 찾아오는 새의 이름을 나는 애써 부르지 않기로 한다. 지금은 사람들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살아가는 시대, 익명이 주는 안정감에 길들여져 가는 것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그래도 광주천의 물소리는 낭랑하다. 인간의 노래보다 더 오랜 저 멜로디를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의 언어로 된 노래는 가짜다!
윌러드 대위가 가로지르는 캄보디아는 인간의 비명으로 가득하다. 때로는 섬뜩한 적막이 그들을 가로막기도 한다. 하지만 진격해야 하는 것이 전사의 운명이다. 밀림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고, 원주민들이 던진 창에 가슴을 관통당한다. 정말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또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지옥의 여행은 안개를 헤쳐 나아가야 한다.
80년 5월의 광주가 그러했으리라. 지금의 미얀마도 그러하리라. 잔혹했던 인류의 전쟁이 그러했으리. 인간의 역사는 폭력! 한 편의 영화에 다름 아닌가. 그것을 <지옥의 묵시록>은 증언하려는 것인가. 미얀마의 군부세력이 또한 확인시켜주려는 것이던가! 과연 박정희와 전두환의 일당들은 어떤가. 아직 처형되지 않은 그들은 위대하기 때문인가. 거리에는 수많은 목숨들이 비참한 최후로 나뒹굴고, 비극은 채 아물기도 전에 희극을 불러낸다. 악마들은 도처에 득실거린다.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자유민주주의”가 자행된다.
이제 커츠 대령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게 있다. 커츠는 육군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에 한국전쟁 등에서 수많은 공을 세운 엘리트이다. 장래에는 장군이나 육군 참모가 될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한다. 명백한 반란이다. 월맹군의 정보장교 등을 처형하기도 한다. 그는 캄보디아 국경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새로운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조국인 미국과도 월맹과도 싸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미국의 적이자 동시에 월맹의 적이 된 인물인 것이다.
영화는 커츠의 왕국에서 풍요의 기원을 위한 땅의 축제가 시작된다. 원시적인 북의 리듬과 함께 신을 위한 제물로 물소가 바쳐진다. 축제의 신명을 뜷고 윌러드는 커츠가 있는 사원에 잠입한다. 그리고 커츠를 만난다. 마침내 맞닥뜨린 두 사람. 커츠는 윌라드에게 말한다.
“너는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있는가? 타인의 의견으로부터 자유, 게다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나는 공포를 봤다. 네가 본 공포를. 너에게는 나를 살인마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 나를 죽일 권리는 있다. 하지만 나를 재판할 권리는 없다…….”
“아들에게는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누군가가 고향에 가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본 모든 것을. 왜냐하면, 계속된 거짓과 기만만큼 증오해야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말한다. “베트남 전쟁의 공포와 광기, 도덕적 딜레마 등의 의식을 전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라고. 커츠를 통해 한 인간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이 사회와 제도. 그리하여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말이다.
윌러드는 어느 순간 이 잔인한 현실을 비켜나고 싶다. 강을 거슬러 오를수록 미궁에 빠지기만 하는 이상한 여행을 끝장내고 싶다. 정말이지 <지옥>에 빠져버린 것일까. 어느덧 일상을 잃어버린 자신을 깨닫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는다. 조작되고 거짓된 진리로 만들어진 기만적인 사회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그것이 삶일지도 모른다. 미얀마의 시민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일상이다. 참혹했던 광주의 기억도 불구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시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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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러드가 그렇듯이 나는 지금 지극히 개인적인 울분만을 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변혁을 위해 또 다른 <5월 광주>가 호명되어야 한다고 웅변할 수도 없으면서, 거짓과 허위로 가득 찬 세계의 “수금원”에 불과할지도 모르면서도 평화로운 일상이라는 최면 같은 현재를 살아야 한다.
윌러드는 다시 강을 흘러 내려온다. 돌아가면 평범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아직 살아있음을 자위하면서, 애써 저 숱한 죽음들을 떨쳐내려 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레바논에서,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이 세계 어딘가의 고통과 상관없이 거짓된 평온을 찾아서…….
한 프랑스인 농장주의 말을 통해 감독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자네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너희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많은 피를 보아야 했는가?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저 미얀마의 쿠데타 세력과 세계 도처의 파시스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수천수만 번이라도 묻고 싶다. 그리고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나의 눈앞에 파란 바닷가 모래사장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짙은 쪽빛 하늘엔 동그란 황금빛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오늘도 나는 우리가 사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을 건넜다. 어제의 강물이 오늘도 내일도 흐른다. 잠시 귀를 대이면 신의 음성이 들린다. 이때에는 부디 인간의 언어로 노래를 들어서는 안 된다. 다만 귀 기울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강물은 흐르는 것이다. 영산강도 메콩강도 그러한 세월을 면면히 흘렀고 흐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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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말론 브란도(월터 E. 커츠 대령), 로버트 듀발(빌 킬고어 중령), 마틴 쉰(벤자민 L. 윌라드 대위)
<채어린-자유기고가>
*본 내용은 지난 2021년 3월 기고문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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